항목 ID | GC047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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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協 |
이칭/별칭 | 중화(仲和),농암(農巖),삼주(三洲),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현숙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있었던 학산 서원에 배향된 이단상(李端相) 문하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이다. 시호(詩號)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문충공 김수항(金壽恒),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광찬,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김상헌(金尙憲)이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로 부제학을 지낸 문정공 이단상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아우이다.
[활동 사항]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경기도 과천(果川) 명월리(明月里)에서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 문과에서 전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 지평,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 이조(吏曹) 정랑(正郞),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청풍도호부의 도호부사로 재직하던 1689년(숙종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영평(永平)[지금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매바위]에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아버지가 신원·복관되었다. 이후 대사간, 홍문관 제학, 이조 참판, 대사헌, 예조 참판, 예문관 제학 등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8년(숙종 34) 58세로 별세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실린 김창협의 졸기(卒記)[조선 시대에 어떤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사관들이 판단해 적은 기록]에는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點)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文章)은 농욱(醲郁)을 모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중국의 당송 팔대가 중 한 명이었던 송나라 문인 구양수를 일컬음]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論)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홍유(鴻儒)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그는 벼슬보다는 뛰어난 학문과 문장,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으나,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 가까웠다.
그의 문장과 글씨로는 「문정공 이단상 비(文貞公李端相碑)」, 「감사 이만웅 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 표(金崇謙表)」, 「김명원 신도비 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의 전액(篆額) 등 작품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 『주자 대전 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논어상설(論語詳說)』, 『오자수언(五子粹言)』, 『이가 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 연보(文谷年譜)』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묘역은 덕소리의 석실 마을에 있는 석실 서원(石室書院) 묘정비 뒤 낮은 언덕에 있으며, 부인인 연안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의 석실 서원, 전라북도 영암군의 녹동 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