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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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宮憘 |
이칭/별칭 | 구중(懼仲),교리공(校理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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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함열(咸悅) |
대표관직 | 홍문관 교리,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510년 - 남궁 희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남궁 희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5년 1월 13일 - 남궁 희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3월 26일 - 남궁 희 인천 부사 파직 |
몰년 시기/일시 | 1597년 9월 27일 - 남궁 희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교리공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2 |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구중(懼仲)이다. 아버지는 전라도 전주부 임피현[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의 현령을 지낸 남궁 익(南宮 翼),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연안 김씨(延安 金氏)이다. 그는 3남 중에 장남이고, 숙부인(淑夫人) 초계 정씨(草溪 鄭氏)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남궁 활(南宮 活)을 두었다.
[활동 사항]
남궁 희(南宮憘)[1510~1597]는 1540년(중종 35)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 4위로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식년시 병과(丙科) 1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호조(戶曺) 정랑(正郞), 사첨시정(司瞻寺正),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등을 역임하였고,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별히 그 사이에 1557년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호조 정랑에서 파직되었고, 1565년 1월 13일 인천도호부로 부임하여 1566년 3월 26일까지 14개월 동안 부사를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현재 온양 민속 박물관에 남궁 활의 지석(誌石)이 남아 있는데, 남궁 활은 남궁 희의 아들이다. 남궁 활이 단명하였기에 특이하게도 아버지인 남궁 희가 직접 지문(誌文)을 지어 남궁활의 가계와 관력을 간단하게 기록해 두었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6-2에 있는 함열 남궁씨의 만세동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함열 남궁씨의 후손들은 남궁 희를 교리공파(校理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