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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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義生 |
이칭/별칭 | 의지(宜之),위숙(魏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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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여흥(驪興) |
대표관직 | 지인천군사|예조 판서|지중추원사 |
출생 시기/일시 | 1379년 - 민의생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418년 3월 - 민의생 지인천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18년 10월 - 민의생 지인천군사 사직 |
몰년 시기/일시 | 1444년 - 민의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44년 5월 10일 - 민의생 위숙 시호를 받음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군(仁川郡)의 지인천군사(知仁川郡事)를 지낸 문신.
[개설]
1418년 3월 지인천군사로 부임하여 같은 해 10월까지 약 7개월간 복무하다가 모친상을 만나 사직하였다.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의지(宜之)이다. 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민중리(閔中理), 어머니는 진주 유씨(晉州 柳氏)로 고려 말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유지정(柳之淀)의 딸이다. 그리고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역임한 이구(李龜)의 딸 전의 이씨(全義 李氏)와의 사이에서 아들 민자온(閔子溫)을 두었다.
[활동 사항]
민의생(閔義生)[1379~1444]은 조선 개국 초기인 1396년(태조 5)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유(成均學諭)로 보직되었다. 이때 함께 문과에 급제한 하연(河演), 심도원(沈道源), 금유(琴柔) 등은 민의생과 평생 막역한 교유 관계를 맺었다.
1417년(태종 17)에 의금부 지사를 역임하고, 직예문관(直藝文館)을 거쳐 1418년 3월 지인천군사로 부임하여 10월까지 약 7개월간 인천에서 복무하였다. 세종(世宗) 때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병조 참의, 인수부 윤(仁壽府尹), 경기 감사를 하였다. 판승문원사로 재직할 때에 승문원의 문적이 어수선하자, 민의생이 문서 보관할 집을 짓자고 건의하여, 부류별(部類別)로 소장하게 하여 서로 견주어 보고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1435년(세종 17)에 우의정 노한(盧閈)과 함께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명(明)나라 사행을 갔다 돌아왔다. 1436년(세종 18)에 동지중추원사로서 오례(五禮)[나라에서 행하던 다섯 가지 의례(儀禮), 국가 질서에 관계되는 예로 왕조례(王朝禮), 즉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를 말함]의 하나인 길례[종묘 사직과 산천·기우·선농(先農) 등 국가에서 행하는 의례 및 관료와 백성의 시향(時享) 행사] 가운데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 하나. 국가의 제2등급 사전(祀典)]인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바람, 구름, 우레, 비의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여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지내는 제사]에 대해 고제(古制)를 따를 것을 상서했다. 이후 세종 후반기에 이조 판서, 예문관 제학, 공조 참판, 예조 판서, 지중추원사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예조 판서로 있던 1439년(세종 21)에는 다시 사행을 다녀왔다. 1444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민의생이 사망하자, 세종은 조회를 멈추고 치조(致弔)[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조문함]·치부(致賻)[임금이 특명으로 신하에게 부의(賻儀)를 내림]하였고, 1444년 5월 10일에 위숙(魏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시호에 대해 “위엄이 있고 민첩하게 행함을 위(魏)라 하고, 마음을 잡아 결단하는 것을 숙(肅)이라.”라는 내용을 부연하였다. 또한 민의생은 불사(佛事)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