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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59
한자 朴剛生
이칭/별칭 유지(柔之),나산경수(蘿山耕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밀양(密陽)
대표관직 지인주사|안변도호부 도호부사
출생 시기/일시 1369년연표보기 - 박강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90년 - 박강생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09년 10월연표보기 - 박강생 지인주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422년연표보기 - 박강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24년 - 박강생 찬성 추증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주(仁州)의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이다. 아버지는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지낸 박침(朴沈)이고,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여식이다. 윤승경(尹承慶)의 여식을 아내로 맞았다.

[활동 사항]

박강생(朴剛生)[1369~1422]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1390년(공양왕 2) 경오방(庚午榜) 병과(丙科) 3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藝文) 검열(檢閱)에 보직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 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의 환심을 사고 돌아오니 태종(太宗)으로부터 미두(米豆)를 하사받고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09년 10월에 지금의 인천으로 부임하여 지인주사로 4개월간 복무하다가 조모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412년에 지인주사로 있을 때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태형(笞刑)을 받았다. 1417년에 수원 부사로 재임 중 한양으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 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하여 죽음으로써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고, 후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世宗)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문장이 유려하여 문명을 떨쳤다. 1422년(세종 4)에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424년(세종 6)에 박강생의 여식이 세종의 후궁인 장의궁주(莊懿宮主)가 됨으로써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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