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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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齊晟 |
이칭/별칭 | 성집(聖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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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관직 | 인천도호부 부사|동부승지 |
출생 시기/일시 | 1840년 - 박제성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869년 - 박제성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4월 27일 - 박제성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5월 5일 - 박제성 인천 부사 이임 |
추모 시기/일시 | 1884년 5월 - 박제성 청덕 선정 불망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884년 10월 - 박제성 영세 불망비 건립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유배|이배지 | 유배지 - 평안도 숙천부 |
선정비 | 박제성 청덕 선정 불망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인천 향교 앞 |
[정의]
조선 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집(聖執)이다. 아버지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한 박홍수(朴弘壽)이고, 어머니는 조경원(趙敬源)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제성(朴齊晟)[1840~?]은 1865년(고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869년에 정시(庭試) 병과(丙科) 15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73년에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이 되어 대원군(大院君)의 하야와 고종(高宗)의 친정을 요구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와 관련하여 사의를 표명한 옥당(玉堂)[홍문관을 뜻함]의 연차(聯箚)[聯名箚子 : 연명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글]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도 대원군의 복권을 상소한 부사과(副司果) 이휘림(李彙林)의 국문(鞠問)을 요구하는 상소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된 뒤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손영로(孫永老) 사건, 신철균(申哲均) 사건 등의 처벌 강화를 주장하는 상소에 계속 참여하였다. 1877년 부응교(副應敎), 다음해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는 등 주로 언론을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박세성은 1880년에는 부묘도감(祔廟都監)의 부향친제시(祔享親祭時) 도청(都廳)에 참가하여 품계가 올랐다. 1882년 안변 도호부사로 재직할 당시 일본인 3명이 조약을 어기고 개항장 밖으로 월경하여 조선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도한 행위를 하여 군중에게 난타당하고 그 중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함경 감사와 남병사(南兵使)가 장계를 올리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책임을 물어 덕원도호부 부사 정학묵(鄭學默)과 함께 처벌받았다. 1883년 4월 27일 인천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다음해 5월 5일까지 약 25개월간 복무했고, 이어서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왕명을 어긴 죄목으로 평안도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
박제성이 인천 도호부사로 재임 중이던 1884년 5월에 인천도호부 부내면 인민들이 ‘박제성 청덕 선정 불망비(朴齊晟淸德善政不忘碑)’, 그해 10월에는 인천도호부 서면의 인민들이 중심이 되어 ‘박제성 영세 불망비(朴齊晟永世不忘碑)’를 건립하였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번지] 인천 향교 앞 비석군에 두 선정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