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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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宗德 |
이칭/별칭 | 박상덕(朴相德),여수(汝壽),효헌(孝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수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에 묘소를 조성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상덕(相德), 자는 여수(汝受)이다. 아버지는 진사 박흥원(朴興源)이고, 어머니는 종실(宗室)인 청릉군(靑陵君) 이모(李模)의 딸이다. 그리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한 박종악(朴宗岳)과 동기간이다.
[활동 사항]
박종덕(朴宗德)[1724~1779]은 1746년(영조 22)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2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748년에 설서(說書)와 사서(司書)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어 이종성(李宗城)을 공격하였다. 1750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고, 이듬해 정익하(鄭益河)의 승진을 비난함으로써 그와 분란을 빚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으나 대간 처벌에 반대하다가 체차(遞差) 당하였다.
다시 승지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곡산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753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진휼 곡식을 늘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대사간·황해도 관찰사·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를 거듭 역임하였으며, 1759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이 되었다.
1760년 이조 참판으로 재직 중 판서(判書) 이익보(李益輔)가 편중된 인사를 하여 파직당할 때 그 인사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체차 당하였으며, 1761년 개성(開城) 유수(留守), 이듬해 이조 참판을 거쳐 1763년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흉년으로 인하여 불법적으로 연말에 재결을 더 청하였다가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곧 공조 참판에 임명되고 1764년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인사 내용이 문제가 되어 영흥 부사로 좌천되었다. 같은 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766년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김용택(金龍澤)의 신원에 찬성하였다. 이후 예조 판서를 거쳐 1767년 평안도 감사로 재직할 때는 곽산의 읍치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1769년 이후 대사헌·형조 판서·이조 판서·예조 판서·한성부 판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이조 판서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1773년 병조 판서로 재직 중 비변사(備邊司)의 업무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또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대사헌 의망(擬望)[관직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을 임금의 뜻에 어긋나게 하여 삭직되기도 하고 궁중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파직된 일도 있다. 1774년 병조 판서에 특제(特除)되었고, 1775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임명되었으나 고향에서 올라오지 않아 유배되었으며, 또 이조 판서로 일하다가 임금의 뜻에 어긋나 삭직되기도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잠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이후 세자시강원 빈객(賓客)을 역임하였다.
[묘소]
『인천부 읍지(仁川府 邑誌)』(1842, 1871, 1899) 총묘(塚墓) 조에 따르면 인천도호부 남촌면에 박종덕의 묘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잔존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