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70 |
---|---|
한자 | 朴弼傅 |
이칭/별칭 | 경뢰(景賚),성암(省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
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관직 | 인천도호부 부사|집의(執義) |
출생 시기/일시 | 1687년 - 박필부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박필부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44년 12월 28일 - 박필부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47년 5월 29일 - 박필부 인천 부사 사직 |
몰년 시기/일시 | 1752년 - 박필부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이며, 자는 경뢰(景賚), 호는 성암(省菴)이다.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박세채(朴世采)의 손자이고, 수운판관(水運判官)[조선 시대에 선박을 만들거나 관리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전함사에 속하여 수운(水運)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종오품 벼슬]을 역임한 박태흥(朴泰興)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박필부(朴弼傅)[1687~1752]는 일찍이 학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천거를 받아 세자시강원[왕세자(王世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자의(世子侍講院諮議)와 세자익위사[왕세자를 호위하던 관청] 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출사하였다. 1723년(경종 3) 내시교관(內侍敎官)[궁중의 내시를 교육하고 훈도하는 일을 맡아 하던 벼슬]을 거쳐, 1725년(영조 1) 증광시(增廣試)[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 생원에 합격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했다. 그리고 외직으로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지내다가 1730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1735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발탁되어 경연관(經筵官)[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경연에 참여하는 관리]에 뽑혔으며, 1737년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단양 군수(端陽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741년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1744년[甲子] 12월 29일 인천도호부 부사로 부임하여 1747년[丁卯] 5월 29일까지 약 30개월간 인천에서 복무했다.
1749년 사도 세자가 국정을 대리하자 치국(治國)의 도리로서, ‘효도를 권면할 것, 대지(大志)로 분발할 것, 기강을 세울 것, 대의(大義)를 밝힐 것, 어질고 사악함을 분별할 것’ 등의 5개 조목의 상소를 올려 크게 칭송을 받았다.
1750년 산림직(山林職)[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지내는 선비인 산림을 특별히 우대해 등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만든, 산림만이 진출할 수 있는 관직]인 성균관 제주(成均館祭酒) 등을 역임했고, 1752년 장례원[공사(公私) 노비 문서의 관리와 노비 소송을 맡아보던 관아]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박필부는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밝아 당대의 대학자 윤증(尹拯)[1629년~1714년] 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왕실 전례(典禮)[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 등에 대한 자문(諮問)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