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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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厚 |
이칭/별칭 | 덕재(德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은수 |
활동 시기/일시 | 1498년 - 서후 문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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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8년 9월 - 서후 인천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겨울 - 서후 인천도호부사 이임 |
부임|활동지 | 서후 부임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유배|이배지 | 서후 유배지 - 충청북도 음성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대구(大邱) |
대표 관직 | 인천도호부사 |
[정의]
조선 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 부사를 역임했던 문신.
[개설]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1518년 9월 인천으로 부임하여 1519년 겨울까지 약 12개월 이상 인천 부사를 역임했다.
[가계]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덕재(德載)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를 역임한 서팽소(徐彭召)이고, 어머니는 양지(楊沚)의 딸인 안악 양씨(安岳楊氏)이다. 이조 좌랑을 역임한 양순경(梁舜卿)의 딸 충주 양씨와 혼인하였고, 사가정(四佳亭)서거정(徐居正)이 종조부이다.
[활동 사항]
서후(徐厚)[?~?]는 1496년(연산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원으로 출사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충청북도음성으로 유배되었고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재기용되어 사헌부 지평·장령 등의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
1512년(중종 7) 정조사(正朝使) 이구검(李久儉)을 수행한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학문이 뛰어나서 1516년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이 합의하여 사유(師儒)에 합당한 인물을 선발할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뽑힌 적도 있었다. 1518년 9월 인천 부사로 부임하여 다음해 겨울까지 복무했고, 1521년 홍문관 직제학으로서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겸하여 그 전해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金湜), 조광조(趙光祖) 등에 대해 간악하다고 극론함으로써 많은 사림으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그는 또 군기(軍器)에 큰 관심을 나타내어 직제학에 재임할 때 100근이나 되는 강노(强弩)를 만들어 중종에게 바친 바 있고, 이듬해에는 일찍이 만들었던 편조전(鞭條箭)을 개량하여 120근의 궁노(弓弩)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동부승지로 옮겼으며,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으로 역제(驛制)의 개혁과 전선(戰船)의 수리 등 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역임한 뒤 1525년 아들 서증(徐嶒)가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한때 투옥되었다가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보임되었다.
이후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1531년 충주 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치 성향면에서 훈구파로서 사림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나 항상 군무(軍務)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문과 저술]
영흥 부사로 재임할 때 시폐 11조의 상소와 함께 군대에 필요한 규모(規模)를 수집해서 만든 『군문요람(軍門要覽)』 1질, 『손자(孫子)』 구주(舊註)에다 제사(諸史)에 전해오는 것을 첨부한 『증손손무경주소(增損孫武經註疏)』, 본받고 경계할 만한 옛사람의 일들을 모아 정리한 『장훈원구(將訓元龜)』 등의 책을 진헌(進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