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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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岐運 |
이칭/별칭 | 봉서(鳳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정윤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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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관직 | 인천 부사 겸 감리|농상공부 대신|중추원 부의장 |
출생 시기/일시 | 1847년 - 성기운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884년 - 성기운 주청상무서기관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성기운 홍문관 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성기운 형조 참의·좌부승지·한성부 소윤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0년 - 성기운 인천 부사 겸 감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성기운 주차일본전권공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성기운 철도원 총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성기운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 관찰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성기운 박제순 친일 내각의 농상공부 대신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성기운 중추원 부의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성기운 장례원 경 임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성기운 일본 정부의 남작 작위 받음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인물.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봉서(鳳瑞)이다. 아버지는 성의익(成義益)이다.
[활동 사항]
성기운(成岐運)[1847~?]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1880년(고종 17)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60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4년 3월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이 되어 청의 톈진[天津]에 주재하면서 약 1년간 청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뒤 귀국하였다. 1885년 4월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1887년 인천 전환국(仁川典圜局)의 총판(總辦), 1889년에는 형조 참의·좌부승지·한성부(漢城府) 소윤(少尹) 등을 역임하였고, 1890년(고종 27) 9월~1893년(고종 30) 7월에는 인천 부사 겸 감리로 임명되어 각국과의 교섭 및 통상 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1900년 11월 주차일본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로 약 반 년 동안 일본에 주재하였다. 1902년 12월 철도원(鐵道院) 총재로 경부선 철도 공사에 관여하였고, 1904년 이후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906년 11월 박제순(朴齊純) 내각의 농상공부 대신, 1907년 6월 중추원(中樞院) 부의장, 1908년 장례원(掌禮院) 경(卿)을 역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 친일 정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