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95 |
---|---|
한자 | 沈德簿-沈德符 |
이칭/별칭 | 득지(得之),노당(蘆堂),허당(虛堂),허강(虛江),공정(恭靖),정안(定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오정윤 |
[정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인천 토성(土姓)인 인천 문씨(仁川門氏)와 혼인 관계를 맺은 문신.
[가계]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득지(得之)이고, 호는 노당(蘆堂)·허당(虛堂)이다. 아버지는 심룡(沈龍), 할아버지는 심연(沈淵), 증조할아버지는 심홍부(沈洪孚)이다.
[활동 사항]
심덕부(沈德簿)[1328~1401]는 청송 심씨(靑松沈氏)가 조선 전기 거족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만든 인물이다. 세종(世宗)의 비인 소헌 왕후의 할아버지이자, 인천 토성(土姓)인 인천 문씨와 혼인 관계이다. 고려 말인 1332년(충숙왕 복위년)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 동정(司溫直長同正)으로 출사하였다. 1364년(공민왕 13)에 수원부(水原府) 수령·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역임하였다. 우왕(禑王) 재위 기간에는 우상시(右常侍)·밀직부사·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강계도 만호(江界都萬戶)·의주부 원수(義州副元帥)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 1)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서해도 원수(西海道元帥)를 역임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80년(우왕 6)에 도원수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진포(鎭浦)[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를 실전에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5년(우왕 11)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겸 동북면 상원수(東北面上元帥)로 요외평(要外平)과 단천에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여 동북면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같은 해 청성 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에 서경도 원수(西京都元帥)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 옹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공양왕 즉위 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평양도 통사(平壤都統使)를 역임하였다. 다음 해 청성군 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으나, 무고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문하좌시중에 복직되었고,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 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회군 공신(回軍功臣) 1등,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1394년(태조 3)에는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 전 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과 함께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判事)로 임명되어 한양의 궁궐과 종묘 영건(營建)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을 주도하였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 1399년(정종 1)에 좌의정을 역임하고 1400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1401년(태종 1) 74세에 죽었다.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 여섯째 아들 심종(沈淙)은 태조(太祖)의 부마(駙馬)이다.
[묘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묘 및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청성부원군, 청성군 충의백, 회군 공신 1등, 청성백 등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공정(恭靖)·정안(定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