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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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孝立 |
이칭/별칭 | 행원(行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정윤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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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문화(文化) |
대표관직 | 인천 부사|호조 참의|우부승지 |
출생 시기/일시 | 1579년 - 유효립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유효립 증광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유효립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4년 - 유효립 사헌부 정언과 병조 정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유효립 영건도감 도청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19년 - 유효립 호조 참의와 우부승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유효립 인조반정으로 제천에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628년 - 유효립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유배|이배지 | 유효립 유배 - 충청북도 제천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지금의 황해도 신천]이며, 자는 행원(行源)이다. 아버지는 유희갱(柳希鏗), 할아버지는 유자신(柳自新), 증조할아버지는 유잠(柳潛)이며, 외할아버지는 이현(李俔)이다.
[활동 사항]
유효립(柳孝立)[1579~1628]은 1609년(광해군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610년 2월 인천 부사로 부임하였으나 도사와의 상피(相避)[친족 또는 기타 관계로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을 피함]로 사직하였다. 1614년 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병조 정랑, 1616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제용감(濟用監) 정(正)·군자감(軍資監) 정(正), 1618년 영건도감(營建都監) 도청(都廳)·장악원(掌樂院) 정(正), 1619년 호조 참의·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처남인 숙부 유희분(柳希奮)이 참형을 당하고 자신은 충청북도 제천으로 유배되자,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을 계획하였다. 유효립은 먼저 계룡산으로 천도하는 것이 천명이라는 비결을 들어 인성군이 왕이 될 것이라고 유포함으로써 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자기의 아들 등을 서울에 잠입시켜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전 좌랑 정심(鄭沁)·전 전적 김탁(金鐸)·진사 유두립(柳斗立)·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모의하여 내응토록 하였고, 궁궐의 시녀·내시·수문장과 모의하여 대궐 침입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1월 3일에 허적(許𥛚)의 고변으로 비변사에 의해 거사 가담자들 모두가 체포됨으로써 모반은 실패하고 가담자 5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