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46 |
---|---|
한자 | 李枝茂 |
이칭/별칭 | 무백(茂伯),수암(壽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
성별 | 남 |
본관 | 전의(全義) |
대표관직 | 인천 부사|우부승지 |
출생 시기/일시 | 1604년 - 이지무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 - 이지무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65년 - 이지무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6년 - 이지무 인천 부사 이임 |
몰년 시기/일시 | 1678년 - 이지무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무백(茂伯), 호는 수암(壽菴)이다. 아버지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이진경(李眞卿)이고, 어머니는 이우(李佑)의 딸이다. 승정원 승지를 역임한 최응허(崔應虛)의 딸 경주 최씨와 혼인하였고, 다시 임명(林蓂)의 딸 홍주 임씨를 후배(後配)로 맞았다.
[활동 사항]
이지무(李枝茂)[1604~1678]는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5년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6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644년에 정언(正言)과 사서(司書)를 지냈고, 1649년(인조 27)에는 세자가 심양(沈陽)으로 갈 때 노모 봉양을 이유로 호송을 거부하였다가, 인조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장령(掌令)과 필선(弼善)을 역임하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귀국한 뒤에 청나라 체류 시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딸의 소환을 청나라 조정에 주청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을 박탈당한 뒤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장령과 정언, 헌납(獻納)을 거쳐 1665년(현종 6) 8월 인천으로 부임하여 1666년 10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인천 부사를 역임하다가 강계(江界) 부사로 이임하였다. 1670년 형조 참의, 다음 해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673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