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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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世雄 |
이칭/별칭 | 경응(景應),견벽(見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상태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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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온양(溫陽) |
대표관직 | 성균관 사성|사섬시 첨정|인천 부사|남원 부사|김해 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정세웅 증광시 진사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정세웅 식년시 병과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25년 - 정세웅 사헌부 장령·성균관 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26년 1월 - 정세웅 인천 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29년 1월 - 정세웅 인천 도호부사 사임 |
활동 시기/일시 | 1535년 - 정세웅 남원 부사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543년 - 정세웅 김해 부사 파직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자는 경응(景應)이고, 호는 견벽(見碧)이다. 부친은 학생(學生) 정수정(鄭守精)이다.
[활동 사항]
정세웅(鄭世雄)[?~?]은 1507년(중종 2) 증광시에서 진사 3등 16위로 합격하였고, 1513년(중종 8) 식년시에서 병과 16위로 문과 급제하였고 1525년(중종 20)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다.
1526년 1월 조선 시대에 저화(楮貨)[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으로 있다가 인천도호부 부사로 부임하였고 1529년 1월 부친상을 당하여 그만 둘 때까지 37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정세웅은 1534년(중종 29)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고 이후 장령을 재차 역임하였는데, 악처(惡妻)에게 휘둘려 남편으로서의 위엄을 잃었다는 내용으로 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 결과 해당 직위에서 교체되었다.
1535년(중종 30)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재직 중, 재차 그의 아내가 문제가 되어 대사간(大司諫) 허항(許沆)으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해당 관직에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정세웅이 인천도호부 부사로 재직 중 일어난 일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그 내용의 대강은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있을 때 사나운 처에게 통제를 받아 꼼짝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정세웅은 객사(客舍)에 앉아 있고 그의 처는 향리(鄕吏)의 처를 데리고 동산(東山)에서 놀이를 하는데도 막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민폐를 끼친 것도 적지 않습니다. 정세웅은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정사(呈辭)하고 돌아갔는데, 그 처는 서울로 오고 정세웅은 충주(忠州)로 갔습니다. 그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이러하니 벼슬에 있으면서 한 일을 알 만합니다.”라는 것이다. 이에 왕은 “정세웅은 처의 성품이 몹시 사나우니 폐를 끼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체직시키라.”라고 하였다.
정세웅은 1543년(중종 38)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재직 중, 복잡한 사무 처리에 미흡하다는 내용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고 해당 관직에서 교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