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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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彦璜 |
이칭/별칭 | 중휘(仲徽),위수(渭叟),묵공옹(默拱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성격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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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나주 |
대표관직 | 인천 도호부사|강원도 관찰사 |
출생 시기/일시 | 1597년 - 정언황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15년 - 정언황 식년시 진사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정언황 별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 정언황 신계 현령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정언황 인천 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정언황 동부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7년 - 정언황 병조 참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정언황 회양 부사 자원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 정언황 제주 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정언황 우부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정언황 강원 감사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정언황 우부승지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72년 - 정언황 사망 |
거주|이주지 | 은휴정 - 강원도 원주시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정언황 묘비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 앞산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개설]
정언황(丁彦璜)[1597~1672]은 1597년(선조 30)~1672년(현종 13)에 활동한 문신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외직에 있을 때는 고을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휘(仲徽) 또는 위수(渭叟)이며, 호는 묵공옹(默拱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응두(丁應斗), 할아버지는 정윤복(丁胤福)이다. 사성(司成) 정호관(丁好寬)과 선략장군(宣略將軍) 이광립(李光立)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내는 조정립(趙正立)의 여식이다. 아들로는 정시한(丁時翰) 등이 있다.
[활동 사항]
1615년(광해군 7)에 식년시(式年試) 식년 진사 2등 16위로 진사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 무진(戊辰)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4위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광해군(光海君) 때 정언황의 아버지인 정호관이 대관(臺官)으로서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출치(黜置)에 관여했다하여, 관로가 순조롭지 못하였다.
1634년 신계 현령을 비롯하여 1642년에는 사헌부 장령, 1646년에는 동부승지와 우부승지를 그리고 1647년에는 병조 참지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서장관으로 심양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1648년 강빈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어린 세 아들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외직을 자원하여 회양 부사가 되었다. 정언황은 회양 부사로서 협곡의 전세(田稅)를 면포로 상납케 하고, 호표(虎豹)를 받치는 백성에게는 1년 치의 조세를 면하게 하였다. 또한 안동 부사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신라 공주라 하면서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사(妖祠)를 불태워 중지시켰다.
1651년(효종 2)에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주벽이 심하다는 이유로 체차(遞差) 되었으며, 이후 우부승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승지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말년에는 강원도 원주로 내려가 은휴정(恩休亭)을 짓고 조용히 독서에 전념하며 지냈다고 한다.
한편 1644년(인조 22) 4월 17일에 인천 도호부사에 제수되어 같은 해 19일 부임하였다가 1644년 11월 24일 질병으로 교체되었다. 총 7개월간 재임하면서 백성들에게 밭은 개간하게 하고, 스스로 검사하여 향리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는 한편, 백성들이 전세의 부과 대상에서 불법으로 토지를 누락시키는 것을 막았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 향교에는 그의 치덕을 기르는 선정비가 남아 있다.
정언황은 부친의 신원을 위해 상소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외방에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 또한 어사, 방백 등에 계(啓)하여 하사품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
정언황의 묘비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 앞산에 있다. 1684년에 세운 것으로 아들 정시한이 글을 짓고, 손자 정도항(丁道恒)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