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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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昌燾 |
이칭/별칭 | 사원(士元)│덕암(德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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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압해(押海) |
대표관직 | 인천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623년 - 정창도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정창도 증광시 문과 을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87년 - 정창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9년 - 정창도 복작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관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정창도 묘소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주암리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압해(押海)이며, 자는 사원(士元), 호는 덕암(德巖)이다. 강원도 관찰사 정윤희(丁胤禧)[1531~1589]의 현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정호경(丁好敬), 할아버지는 정언규(丁彦珪)이다. 가평 군수를 지낸 정시걸(丁時傑)과 이정방(李廷芳)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처는 홍구소(洪九韶)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창도(丁昌燾)[1623~1687]는 1646년(인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었고, 1652년(효종 3) 증광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1657년(효종 8)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평, 장령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에는 서장관이 되어 동지사 조형(趙珩)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북경에서 돌아와 지평, 장령 등을 지냈으며, 1665년(현종 5) 5월 18일 인천 부사에 제수되어, 6월 3일에 부임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2일 감사의 징계로 곧바로 파직되었다. 이후 필선, 헌납, 집의, 삼척 부사, 승지, 황해도 관찰사, 광주 부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하지만 1682년(숙종 8) 복평군 추대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꾀한 허새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당시 정창도는 허새, 민암(閔黯), 권대운(權大運), 오시복(吳始復), 오정위(吳挺緯), 이덕주(李德周), 이우정(李宇鼎), 김환(金煥), 권대재(權大載), 유하익(兪夏益), 이관징(李觀徵), 이운징(李雲徵), 윤천뢰(尹天賚), 황징(黃徵), 노정(盧錠) 등 16인과 결합하여 수원, 장단 등의 경기도 지역에서 동시에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는 경기도 광주 지역을 맡아서 거사하기로 했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정창도는 귀양을 가게 되었고, 1887년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1689년 심재(沈梓)가 그의 죄명이 문안과 다르다는 상소를 올려 복작되었으며, 1693년에는 아경직(亞卿職)[육조의 참판, 좌·우윤 등을 공·정경 등에 상대하여 부르던 명칭]에 추증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는 그가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인천 부사로 부임해 있으면서 정무를 보았던 곳이다.
[학문과 저술]
정윤희 묘[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의 비문은 아버지 정시걸이 짓고, 아들인 정창도가 썼다고 한다.
[묘소]
정창도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주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창도는 1693년 아경직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