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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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好善 |
이칭/별칭 | 사우(士優)│동원(東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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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압해(押海) |
대표관직 | 인천도호부 도호부사|이조 정랑|강원도 관찰사 |
출생 시기/일시 | 1571년 - 정호선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정호선 식년시 을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정호선 예문관 검열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정호선 홍문관 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정호선 이조 정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정호선 성균관 전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정호선 『선조실록』 편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정호선 강원도 관찰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정호선 천추사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정호선 상주 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정호선 계축옥사와 관련해서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정호선 인천 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정호선 파수 대장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32년 - 정호선 사망 |
부임|활동지 | 강원도 관찰사 - 강원도 원주시 |
부임|활동지 | 상주 목사 - 경상북도 상주군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관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묘소|단소 | 정호선 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부곡 마을 |
사당|배향지 | 정호선 위패 - 경상북도 상주시 봉산 서원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개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모론으로 인해 사임하였으며,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안변도호부 도호부사,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파수 대장 등을 지냈다.
[가계]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이며,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亨)이며, 할아버지는 찬성 정응두(鄭應斗)이다. 대사헌 정윤복(鄭胤福)과 사헌부 감찰 한경상(韓景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정호관(鄭好寬), 정호서(鄭好恕) 등이 있다. 강서(姜緖)와 송선(宋瑄)의 딸과 각각 결혼하였으며, 정언원(丁彦瑗), 정언벽(丁彦璧) 등의 자식을 두었다.
[활동 사항]
정호선(丁好善)[1571~1632]은 1601년(선조 34)에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곧바로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된 후 홍문관 수찬(修撰), 이조 좌랑,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1605년에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예(司藝),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또한 1609년에는 성균관 사예 지제교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 교서관 교리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11년에 장령(掌令), 겸필선(兼弼善), 사간(司諫)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하였으며, 이때 부정한 사건에 연루된 춘천 부사 이원엽(李元燁), 양양 현감 신경우(申景遇)를 파직시키는 등 관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1613년부터 집의(執義)와 전한(典翰), 사인(舍人), 보덕(輔德) 등을 거친 후 1616년에는 사인으로 천추사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17년에는 상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이이첨, 정인홍 등의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의해 정세가 크게 혼란하였다. 대북파는 영창 대군(永昌大君)과 김제남(金悌男) 등을 역모로 엮어 죽이고, 인목 대비 폐모론을 대두시켰는데, 인조반정 후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하여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되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발생하였고, 다시 기용된 정호선은 안변도호부 도호부사,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괄(李适)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이괄의 역모를 알리는 고변서에 정호선의 이름이 올라가서 또 한 번의 고초를 겪게 된다. 하지만 동생인 정호서가 정주 목사로 있으면서, 이괄의 사자를 베고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호선 역시 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파수 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을 치고 적군을 기다렸으나,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정호선은 1624년 8월에 인천도호부 도호부사에 부임하여 1626년 3월에 물러나, 약 13개월간 정무를 돌보았는데, 정호선이 지내던 인천도호부 관아는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에 있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부곡 마을에는 정호선의 묘가 있다. 묘소에는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지문과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이 지은 행장(行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유사기(遺事記)」와 부제학 이준(李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경상북도 상주시 봉산 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