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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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德遠 |
이칭/별칭 | 의백(毅伯)│강암(江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화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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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관직 | 인천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550년 - 한덕원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한덕원 장단 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한덕원 전주 부윤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한덕원 강원도 감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한덕원 인천 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한덕원 접반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0년 - 한덕원 동시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0년 - 한덕원 경기도 감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한덕원 황해도 감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한덕원 강원도 감찰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한덕원 한성부 좌윤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한덕원 의주 부윤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한덕원 호조 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한덕원 전라도 감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한덕원 동지중추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한덕원 조도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30년 - 한덕원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관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의백(毅伯), 호는 강암(江岩)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한형(韓浻)이며, 할아버지는 한거비(韓去非)이다. 한곤(韓悃)과 남궁 후(南宮 厚)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한덕구(韓德久), 한덕수(韓德脩) 등이 있다. 처는 성세녕(成世寧)의 딸이고, 자식으로는 한언(韓琂) 등이 있다.
[활동 사항]
한덕원(韓德遠)[1550~1630]은 1573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1582년 식년시 병과에서 문과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예문관 한림으로 추천되었으나 사헌부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 1594년 장단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전주 부윤에 부임하였으나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간원의 간언에 따라 체직되었다. 1596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인천 부사, 해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비변사에서 임진왜란 중 전략적 요충지인 나주에 재량이 있는 한덕원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며, 1600년에는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1603년에는 황해도 관찰사, 1605년에는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또한 같은 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는 의주 부윤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왕세자 책봉을 위한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0년 호조 참판에 이어 1611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1616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617년에는 조도사(調度使)에 제수되었다.
한덕원은 1596년 2월 인천 부사로 부임하였지만 곧바로 해주 목사로 승진하여 임지를 떠나게 된다. 따라서 그가 인천 부사로 재임한 기간은 1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그가 정무를 보았던 인천도호부 관아는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