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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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萬選 |
이칭/별칭 | 사중(士中),유암(流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실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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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풍산(豊山) |
대표관직 | 사옹원 봉사|고양 군수|인천도호부 부사|부평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643년 - 홍만선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666년 - 홍만선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82년 - 홍만선 음보로 출사 |
활동 시기/일시 | 1701년 2월 - 홍만선 인천 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03년 2월 - 홍만선 인천 도호부사 이임 |
활동 시기/일시 | 1707년 11월 25일 - 홍만선 부평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09년 4월 16일 - 홍만선 부평 부사 이임 |
몰년 시기/일시 | 1715년 - 홍만선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실학자.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중(士中), 호는 유암(流巖)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 홍주국(洪柱國)이다.
[활동 사항]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1666년(현종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2년(숙종 8), 30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한성부 참군, 의금부 도사, 공조(工曹)의 좌랑과 정랑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사옹원·사재감(司宰監)·장악원(掌樂院)·사복시(司僕寺) 등의 익위(翊衛), 사옹원·사재감·장악원·사복시 등의 정(正)을 지냈다. 이어 함흥과 대구 등의 판관을 거쳐 대흥, 합천, 고양, 배천, 단양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701년(숙종 27) 2월에 고양 군수로 있다가 인천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1703년 2월에 순사와 상피(相避)[친족 또는 기타 관계로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聽訟), 시관(試官) 따위를 피함]되어 교체되었다. 1707년(숙종 33) 11월 25일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부평 부사에 임명되어 1709년(숙종 35) 4월 16일에 전임되었다.
인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벼슬 생활에서는 당대의 순량리로 꼽혔다. 당론이 심하게 대립하던 당시 많은 인사들이 홍만선을 찾아 의견을 들을 정도로 판단이 공정하고, 부족함과 결점이 없는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유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실용 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 발전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된다. 유중림(柳重臨)과 서유구(徐有榘)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문과 저술]
항상 농업과 농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가 은퇴한 뒤인 1710년경 『산림경제(山林經濟)』 4권을 저술하였다. 『산림경제』는 대표적인 향촌 경제서로 사대부의 산림 생활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에 관한 한, 18세기 이후 새로운 농서(農書) 발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