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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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최동렬 아저씨가 말하는 有名한 곳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
집필자 | 이민우 |
5. 향교동에서 유명한 곳
향교동 마을에서 유명한 곳으로는 무엇보다도 남원향교를 들 수 있다. 향교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 봐도 그렇다. 원래 향교가 있던 마을의 이름이 교동 등으로도 불리어지나 남원의 향교동은 직접 향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호남 지역에는 4대 향교가 있었는데 남원향교를 비롯하여 전주향교, 광주향교, 나주향교가 그것이다. 남원향교는 조선 시대 전체를 통해 123명의 과거(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나주향교의 125명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이는 남원의 교육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며 남원향교가 교육의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 강남 학군처럼 전국 최고의 명문 교육 기관이 바로 우리 이웃에 있었던 셈이다.
향교의 주요 기능 두 가지로는 성현을 모시는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이 있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신 교육 기관이 담당하고 있고, 제사 기능이 향교의 중추적인 기능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충효열 교육, 각종 고문서 보관, 문화 유적 탐방 등 전통 문화를 간직하는 핵심적인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산곡동에 위치하고 있는 교룡산성이 있다. 교룡산성은 백제 시대에 해발 518m의 높은 웅장한 산 능선을 따라 화강암으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남원성은 정방향 읍성인 반면, 교룡산성은 능선을 따라 세운 포곡식 산성이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용이한 산성이다. 교룡산성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임진왜란 전란사 기록에 남아 있는데 안타깝게도 군사적으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만일 정유재란 때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 56,000명과 교룡산성에서 싸웠더라면 승패가 갈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당시 조선군은 교룡산성에서 싸우기를 주장하였으나 작전권과 지휘권을 가진 명나라 지휘관인 양원이 남원산성에서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양원은 기병 출신이라 교룡산성에서 싸우면 보병전은 가능하지만 기병전은 어렵기 때문에 남원산성에서 싸우기를 고집하였는데, 결국엔 남원성에서 비참하게 패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유재란 때 숨진 10,000여 영령을 모신 곳이 만인의총인데, 원래는 남원역 부근 지금의 동충동 충렬사 부근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전해오는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남원성에 있는 백성 6,000명, 조선군 1,000명, 명나라군 3,000명 등 총 1만여 명이 거의 숨지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 많은 시신을 새로 땅을 파서 묻기가 어려워 지금의 충렬사 옆에 옛날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어서 여기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영령이 이런 좁은 웅덩이에 묻힌 상태로 무려 400여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군사 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이 남원을 방문했을 때 지역 원로분들께서 1만여 충절의 넋을 남원역 부근에다가 그대로 모시는 것은 후손들로서 도리에 어긋나니 좋은 성지를 마련해서 이장을 해야 한다고 간절히 건의해서 지금의 자리에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동렬 아저씨 개인 연표
1956년. 남원시 주생면 출생
1963년. 주생국민학교 입학
1969년. 남원 용성중학교 전학
1972년. 남원 농업고등학교 입학
1982년. 지방 공무원 시험 합격
1985년. 변정옥과 결혼 후 2남을 둠
1991년. 남원시 주생면에서 향교동으로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