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주삼산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502
한자 三洲三山閣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왕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조선 후기 - 삼주삼산각 건립
소재지 삼주삼산각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지도보기
성격 가옥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문신 김창협의 가옥.

[개설]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은 경기도 남양주시의 미음나루 인근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한강과 산세가 조화로운 지점에 조성한 가옥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왕숙천석실서원터 사이의 한강 변에 있었다.

김창협은 자신의 호도 지명을 빌려 ‘삼주(三洲)’라고 하였으며, 만년에 삼주삼산각에서 사망하였다. 대표적인 서인 집안으로 김창협의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며, 형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1648~1722]이다. 석실서원(石室書院)이 건립된 배경 인물들이다. 김창협이 47세 되던 1697년 석실서원을 거처로 하였다가 인근에 가옥 몇 칸을 추가로 세워 학문 정진에 힘쓰고자 삼산각을 세웠다. 삼산각 앞 한강 변에 모래톱이 세 개가 있었기 때문에 김창협이 ‘삼주’로 불렀다고 전한다. 삼주삼산각은 삼주에 있는 삼산각이라는 뜻이다.

[변천]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에 의하면, 삼산각 인근은 신선이 노닐 만한 산수가 있으며, 달빛과 강물이 어우러지는 명승이라고 하였다. 김신겸의 문집 『증소집(橧巢集)』에 의하면, 김창협이 만년에 미음의 삼주 인근에 집을 지어 ‘삼산각’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폐가되고 밭이 되면서 살구나무 몇 그루만 남았다고 하였다. 18세기에 김창협의 제자였던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삼주삼산각을 묘사한 『경교명승첩』이 전한다.

[위치]

삼주삼산각은 조선 시대부터 관동과 영남으로 연결되는 육로 및 수로가 연결되던 교통의 요지에 있다. 간송박물관에 소장 중인 1740년 제작한 『경교명승첩』에는 석실서원의 앞으로 흐르던 한강, 미음, 왕숙천, 삼주 등이 등장한다. 『경교명승첩』의 미호에는 한강 변에 삼주로 보이는 모래톱의 뒤쪽에 삼산각이 중앙에 묘사되어 있으며, 주변에 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인근에는 초가집들이 대부분이며 싸리나무로 둘러 있는 것에 비하여 삼산각만 기와집 세 채가 있으며 흙으로 만든 담장이 둘러져 있다.

[의의와 평가]

삼주삼산각은 조선 후기의 대표 명승으로 문인들의 관광지였으며, 겸재 정선이 당시의 모습을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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