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82 |
---|---|
한자 | 信嬪辛氏墓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심안길 7[도곡리 산4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민규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있는 조선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의 묘역.
[개설]
신빈신씨묘역(信嬪辛氏墓域)은 조선 태종(太宗)의 후궁 신빈 신씨(信嬪 辛氏)[?~1435]의 묘역이다. 신빈은 본관이 영산(靈山)[영월(寧越)]이며, 아버지는 검교 공조참의(檢校工曹參議) 신영귀(辛永貴)이다. 신빈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궁인(宮人)이었으며, 1414년 신녕옹주(信寧翁主)에 봉해졌다. 이때 아들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1402~1467]이 정윤(正尹)에 봉해지는데, 함녕군이 1402년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신빈은 1401년경 태종의 승은을 입었으며, 10년 넘게 궁인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22년 세종은 신빈을 신녕옹주에서 궁주(宮主)로 높였는데, 태종은 이를 듣고 “주상은 옹주가 아들 딸이 이미 많고, 또 내 병을 간호한 지가 오래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신빈은 원경왕후 승하 후 다른 후궁이 있었지만 궁 안의 일을 주장하였으며, 태종의 병간호를 오래 하였다. 태종 승하 후에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태종을 위하여 금자(金字)로 『법화경(法華經)』을 사경(寫經)하기도 하였다. 신빈은 3남 7녀를 낳았는데, 3남은 함녕군(諴寧君), 온녕군(溫寧君), 근녕군(謹寧君)이고 7녀는 정신옹주(貞信翁主), 정정옹주(貞靜翁主), 숙정옹주(淑貞翁主), 소선옹주(昭善翁主), 숙경옹주(淑慶翁主), 숙근옹주(淑謹翁主)이다. 1872년 신녕궁주는 ‘신빈’에 봉해졌으며, 이때 태조, 정종의 딸과 태종의 후궁들이 개봉(改封)되었다.
신빈신씨묘역은 2001년 9월 17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신빈신씨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41번지에 있다.
[변천]
세종은 신빈이 사망하자 조상(弔喪)과 치제(致祭)를 내리고 관에서 장사(葬事)를 다스렸으며, 염(斂)에 쓸 의복을 하사하여 묘소 조성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형태]
신빈신씨묘역은 장대석으로 두 단을 나누고 위에는 8각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과 묘표(墓表)[1441년],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다. 아랫단에는 평면 형태 사각형의 장명등(長明燈)과 복두공복(幞頭公服) 차림에 홀을 든 형태의 문인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신빈 신씨 묘표는 하엽수(荷葉首) 형태이며, 받침은 비신과 한 돌로 제작되어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신녕궁주신씨지묘(信寧宮主辛氏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년신유 삼월(正□□年辛酉 三月)’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정통(正統) 6년 신유(辛酉)[1441]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빈 신씨 장명등의 중대에도 장명등의 중대(中臺) 4면에 ‘신녕궁주(信寧宮主)’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서체나 새김 방법으로 볼 때 19세기경 추각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