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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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泰寺址 |
영어의미역 | Gaetaesa Temple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29-1 외 3필지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조원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9월 29일 - 개태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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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개태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절터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940년 |
지정면적 | 65,637㎡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29-1 외 3필지 |
소유자 | 논산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고려 전기 사찰 터.
[변천]
태조 왕건은 936년(태조 19)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후, 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연산면 천호리에 개태사를 창건하기로 하였다. 『고려사』 태조세가 19년조에 따르면 “이 해 광흥사, 현성사, 미륵사, 사천왕사 등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940년 개태사가 완공되자 왕건은 낙성화엄법회를 베풀고 친히 소문(疏文)을 짓기까지 하였다.
왕건은 이 소문에서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조에 부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연궁(蓮宮,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천호산에 개태사를 창건한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에는 제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으며 공민왕의 경우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태사는 태조 이후로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우왕 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서 방화·약탈되었고, 도원수 박인계가 왜구를 맞아 싸우다가 죽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개태사지 내에서 수습되는 백자편으로 보아 개태사는 고려 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법맥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간 금당지로 추정되는 유구는 3차례에 걸쳐 중건되었으나 개태사에 대한 사적기가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한 중건 시기는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사찰 내의 다른 전각도 마찬가지이다.
1934년 여승 김광영(金光營)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개태사지 근처에 절을 짓고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부르기도 했으나 최근에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치]
개태사지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며, 그 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개태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와 중문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남북 중심축이 자북 방향에서 동으로 24도 기울어져 있으며 3차에 걸쳐 중복되었다. 마지막 건물의 규모는 동서 길이 23.85m, 남북 너비 18.1m로 계측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정면의 기둥 간격은 350㎝, 측면의 기둥 간격은 240㎝, 350㎝이다.
추정 금당지에서 가장 특이한 구조는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불단과 같은 구조이다. 세 매의 석재 중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방형 받침돌은 한 변의 길이 190㎝, 높이 52㎝이고 이 받침돌 좌우에 초석이 한 매씩 자리하고 있다. 초석의 상면에는 구멍이 패여 있다. 금당과 중문 사이에는 높이 170㎝의 석축이 동서로 이어져 있다. 중문은 여러 차례 보수한 흔적이 확인된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며 정면의 기둥 간격은 400㎝, 측면의 기둥 간격은 350㎝로 계측되었다.
중문 양쪽에는 측면 1칸의 익실이 부속되어 있다. 중문 남쪽의 축대는 길이 50여m, 높이 3m가 넘으며 이러한 축대는 중문 북쪽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개태사지 내에서는 연화문 및 귀목문 암·수막새를 비롯해 개태사 명문기와와 전, 치미편, 토기편, 청자·백자편, 나발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개태사지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에서도 치석된 가공석재와 장방형의 석조, 그리고 당시의 축대 시설 등을 살필 수 있다. 그밖에 철확 및 청동반자 등이 발굴되었다.
[현황]
개태사지는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사역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사원의 전각 배치 및 범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사역 내에서는 다양한 기와가 수습되고 있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태사지에 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4년 만에 완공한 사찰로, 태조의 진전이 위치한 곳으로 유명하다. 창건 연대가 확실한 사찰로, 인접한 관촉사와 더불어 고려 전기의 거불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