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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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城君神道碑-武石 |
영어의미역 | Spirit Path Monument and Stone Guard at Yi Hyangryeong's Grav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93-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성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7월 3일 - 익성군신도비및무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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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익성군신도비및무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신도비·무인석 |
건립시기/일시 | 1643년 |
높이 | 신도비 167㎝ |
너비 | 신도비: 78㎝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93-3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에 있는 익성군 이향령의 신도비와 무인석.
[개설]
이항령은 선조의 형인 하원군(河原君) 이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선조의 행재소가 있는 의주까지 여러 달 만에 호행해 선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596년(선조 29) 익성군으로 봉해지고 승헌으로 승진하였다. 선조의 세자인 순화군이 후사가 없자 익성군의 3자 진릉군을 후사로 삼았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로 진릉군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사사되었고, 이항령의 아들들은 모두 귀양을 갔다. 이항령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가 3년 만에 병으로 죽었는데, 자식들이 적소에 있어 장례를 치를 수 없자 임시로 익산에 모셨다. 인조 때 벼슬이 회복되어, 1643년(인조 21) 묘소를 은진 땅에 마련하고 신도비와 무석을 세웠다.
[위치]
이항령 묘소는 용산리 옆 작은 구릉에 있는데, 묘 한편에 무인석과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
신도비는 중국식의 이수 대신 조선 고유의 형식인 지붕돌[가첨석]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는 시기의 형식으로, 옛 모습인 이수를 조각하고 귀부 대신 높은 농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대리석 비신의 크기는 높이 167㎝, 폭 78㎝, 두께 24㎝이다. 앞면에 전액을 새기고 조익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여이징이 전액을 썼다.
묘소에 세워진 무인석은 한 쌍으로 왕손의 묘소에 어울리게 장대하며, 조각이 섬세하다.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으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다. 양손은 가운데로 모아 칼을 잡고 있으며 허리에는 칼집을 차고 있다. 엄숙하고 단정하며 위엄이 느껴지는데, 조선 중기의 조각 수준을 가늠해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금석문]
이향령 신도비의 전액은 ‘유명조선국가덕대부익성군신도비명 병서(有名朝鮮國嘉德大夫益城君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비문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세자부 조익 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傳 趙翼 撰)/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 겸지경연춘추관사예문관제학 세자좌빈객 오준 서(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 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世子左賓客 吳竣 書)/ 가의대부이조참판 겸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 여이징 전(嘉義大夫吏曹參判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呂爾徵 篆)”에 이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중종 공희대왕의 아홉째 아들이 덕흥대원군 소이요, 대원군이 세 아들을 두니, 장남은 하원군 정이다. 선조 소경대왕이 차남으로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추존하여 대원군을 봉하였으니, 하원군은 중종의 손자이요, 선조의 형이다. 높은 지위와 후한 녹봉으로 온갖 행복을 누리니, 은총이 한 시대에 빛났다.
공은 하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은 향령이요, 자는 수원으로, 나이 열셋에 벼슬을 받아 익성정이 되었고, 그 후에 도정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께서 의주로 몽진하니, 공이 북방에서 하원군을 모시고,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달 만에 행재에 도달하니, 선조가 가상히 여겼다. 적이 물러가자, 공에게 명하여 먼저 경성에 돌아오게 하였다.
그 후, 병신년에 정의대부로 승진하고, 익성군에 봉하였다. 얼마 후에 승헌대부에 오르고, 병오년에 또 숭헌대부에 올랐다. 광해가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경술년에 가덕대부로 승진하였는데, 실은 1품계이다. 선조의 세대, 왕자 순화군이 아들이 없음으로, 선조의 명으로 공의 셋째 아들 진릉군 태경으로 그의 후계자를 삼았다.
임자년 봄에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나, 진릉군을 추대한 적신 이이첨의 무고로 제주도에 귀양 보내고, 얼마 후에 중도에서 사사되었다. 그리고 공도 다섯 아들 모두 귀양 가는데, 공은 거제도로 유배되어, 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버리니, 향수가 49세이었다.
여러 아들이 아직 죄인의 명부에 올라 있어, 돌아와 장사 지내지 못하고 임시로 익산땅에 가매장하였다. 인조대왕이 등극하여, 광해 때에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일제히 방면하니, 공도 작위를 회복하고, 여러 아들도 모두 작위를 회복하는 동시에, 방면되어 돌아와서, 공의 장지가 부적합하여, 분주히 주선해서, 은진현에서 동쪽 5리 되는 곳을 정하여 해좌 사향 자리에, 계미년 정월 24일 이장하는데, 이 일이 왕에게 들려, 유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게 하였다.
공의 자질은 개방적이고 민첩하며 강직하고 인정이 많음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였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만나면 번번이 취하며, 의기가 호탕하고, 풍류가 활발하여, 선조가 깊이 총애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훌륭한 공자가 될 줄 알았다. 불행하게도 망극한 때를 만나, 환란에 걸리어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어찌 홀로 한 사람만의 화라 하겠는가.
실로 나라의 운수가 연계된 일이로다.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니, 영의정 섬의 따님이요, 부인은 진주소씨이니, 군수 수의 따님이요, 좌찬성 세양의 손녀이다. 찬성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그의 호는 양곡이다. 5남 4녀를 두니, 장남 순경은 진산군이요, 차남 선경은 진천군이요, 다음은 진릉군이요, 다음 승경은 진평부정이요, 다음 윤경은 진계부정이고, 딸은 완천군 최내길에게, 다음은 생원 정대영에게, 다음은 유학 신상급에게, 다음은 유학 이동형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아들 셋을 두니, 득경은 양평 원님이었는데, 임자년 환란 때에 이산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가고, 인경은 양산 원님이요, 의경은 양릉 원님이고, 두 딸은 모두 자녀가 있고, 내외 손자와 증손이 모두 90여 명이 된다. 진천군 희경이 난리 때에 나와 함께 동행한 옛 정이 있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비명을 청하기에, 내가 이미 그 집안이 환란으로 참혹함을 슬퍼하고, 또 그와 피난길에 걱정을 같이 한 정의를 잊을 수가 없어, 삼가 허락하고, 비명을 짓는다. 명하여 가로되, 삼가 생각건대, 성조가 비로소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려 태평백년이 되니, 온 나라가 노래하도다.
공의 자손이 번성하고 떨쳐, 본손과 지손이 백대에 이어지도다. 대대로 친척과 친애함이 돈독하고, 은혜가 동기간에 흡족하도다. 내리 나누는 것이 순수한데, 계통을 잇는 이가 그 사람이 아니로다. 반역한 신하가 임금을 만나니, 오직 죽음만이 들리도다. 드디어 왕손으로 죽음에 이르게한 무리들이 서로 바라 볼 뿐이로다. 가족이 서로 헤어져, 먼 귀양지에서 죽었도다. 신과 사람이 다 같이 분하게 여기니, 팔도가 슬퍼하고 마음이 상하도다. 천운이 돌고 도니, 성인이 일어나도다. 여러 흉도가 처형되니, 모든 원통함이 씻어지도다.
귀양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벼슬이 회복되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온화한 기운이 감돌도다. 좋은 묏자리를 정하였으니, 조정의 예로 장사 지내도다. 평안하게 영원히 잠들 것이니, 영광이 저승까지 미칠 것이로다. 하늘에서 정한 것이,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 어찌 빈 말이랴. 이 이치가 밝고 밝아, 괴로움이 다 하면 편안함이 오는도다. 자손이 번창하니, 집안에 난초와 혜초의 향기로 가득하도다. 남은 경사를 알 수 있으니, 후세에 복을 내림이 무궁하도다. 묘비에 명을 새겨 자손에게 알리니, 너희 조상을 생각하여 경계함을 폐하지 말지니라(惟我中宗恭僖大王之第九子曰德興大院君諱岧大院君有三子長曰河原君諱鋥宣祖昭敬大王以季子登寶位追尊所生大院君河原君以中廟之孫宣廟之兄尊位重祿脩享厚福寵光一時公河原君之第二子也諱享齡子壽元年十三拜爲益城正其後陞都正壬辰倭變宣廟辛義州公自北方奉河原君問關跋涉累月達行在宣廟嘉之賊退命公先還京城歲丙申加正義大夫奉益城君尋超承憲丙午又陞崇憲光海襲位之三年庚戌進秩嘉德實一品階也宣廟之世王子順和君無子宣廟命以公之第三子晋陵君泰慶爲其後壬子春金直哉獄事起推載晋陵君賊臣李爾瞻所鍛錬也遂竄濟州尋賜死於中路於是公及五子皆竄遂而公配巨濟三年以疾終享年四十九諸子方在罪籍不得歸葬權窆于益山及仁祖大王中興凡光海時寃獄一洗滌之公得復爵諸子皆復爵放還以公葬非其地奔走經營得亥坐巳向之原於恩津治東五里所以癸未正月二十四日移窆焉事聞命有司禮葬公資禀開敏剛毅而仁厚出人遠甚善飮酒遇輒至醉意氣豪連風流映發宣廟深加寵遇人皆知其爲佳公子也不幸逢時岡極羅禍患窮阨以終此豈獨一人禍實邦運所系也妣南陽洪氏領議政暹之女夫人晋州蘇氏郡守之女左贊成世讓之孫贊成以文章名世號陽谷有五男四女長順慶晋山君次善慶晋川君次卽晋陵君次承慶晋平副正次潤慶晋溪副正女適完川君崔來吉次適生員鄭大榮次適幼學申尙伋次適幼學李東馨側室子三人得慶楊平守壬子之禍竄理山以死仁慶楊山守義慶楊陵守子女皆有子女內外孫曾總九十餘人晋川有亂離同行之舊以狀來請銘余旣哀其家(裯)之慘又其相從於憂患不可亡也謹諾而銘之銘曰 恭惟聖祖肇受天命治平百年一邦歌詠公姓振振本支百世世篤親親恩洽常棣降割斯純繼統非人賊臣逢君惟戮是聞遂使王孫死徒相望家族分離身隕遐荒神人共憤八路悲傷天運循環聖人有作羣凶伏辜衆寃咸雪流徒得歸官封遂復天壤之間薰然和氣佳城旣卜官庀葬事安永千年榮及九地天定勝人豈虛語哉此理昭昭苦極奉來孫曾蓁蓁蘭蕙滿室乃知後慶垂裕無極刻銘墓碑以詔來裔其念爾租警戒無替).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신도비의 형식이 변모해 가는 과정 중 중간의 위치에 있어 비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무인석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 석조 예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79년 7월 3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