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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57
한자 星州宗家文化-
영어공식명칭 Head Family Culture in Seongju-Yesterday And Today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나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문중에서 대대로 적장자를 중심으로 부계 혈통이 이어져 내려온 집과 그 집에서 존속되어 온 문화.

[개설]

원래 ‘종(宗)’은 사전적 의미로 집[宀]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대(臺)의 상형을 합친 회의 문자이다. 즉, 조상신을 모시는 집, 사당(祠堂)을 뜻한다. 또한 조상이나 족장(族長)을 의미하거나 특정 시조의 자손을 포함하는 친족의 범주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조상을 중심으로 삼느냐에 따라 대종(大宗)이나 소종(小宗), 파종 등 종족의 범주가 달라진다.

대종이나 소종을 잇는 적장자(嫡長子)의 부계 혈통은 ‘종’이 되고, 이러한 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집은 ‘종가’가 된다. 그러나 종가는 혈통에 근거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였다. 불천위(不遷位)가 있어야 하고, 가문의 문화적 전통, 즉 가통(家統)이 있어야 한다. 관작(官爵)을 가진 조상을 시조로 삼고 그 아래의 모든 자손들이 종족 구성원이며, 사당에는 시조의 위패만 모신다. 그리고 그 조상의 적장자만이 종손이 될 수 있다.

종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이다. 봉제사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종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접빈객은 손님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것으로, 다른 종족과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여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봉제사 접빈객의 활동으로 종가의 문화들이 전승되었다. 종손은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예의가 있어야 하며, 종부는 살림살이를 다음 세대에 전승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성주 종가의 현황]

1937년에 편찬된 『성산지(星山誌)』의 성씨 조항에는 108성이, 1996년에 간행된 『성주군지(星州郡誌)』의 「문중사(門中史)」조에는 72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종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1329~1406] 종가이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김석(金錫)이 의성군에 봉해지면서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9세손 김용비(金龍庇)는 의성 김씨의 중시조이고, 김용비의 셋째 아들 김영(金英)의 현손 김용초 때에 성주 대가면 옥성리 안터 마을에 정착하였다. 김용초는 고려 후기 왜적을 토벌하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고, 호남도 병마도절제사와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조선 개국 후 성주로 들어왔고, 말년에는 김천 부항(釜項)에 거주하였다.

김용초는 아들 세 명, 딸 두 명이 있었다. 첫째 아들 김화(金和)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와 혼인하여 김종사(金宗師)를 낳았다. 김종사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혼인하여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첫째 김귀손(金貴孫)은 안터 마을에 남아 종가를 지켰고, 성주 배씨(星州裵氏)와 혼인하여 김윤적(金允迪)을 낳았다. 김윤적과 월성 이씨(月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사우당(四友堂) 김관석(金關石)[1505~1542]이다. 김관석은 지극한 효성으로 특별히 제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김종사의 둘째 아들 김중손(金仲孫)은 경주 장동, 셋째 아들 김윤손(金允孫)은 김천 구미, 막내 김계손(金季孫)은 성주 사월로 갔다. 김계손은 성주 사월 의성 김씨 입향조가 되었고, 후손 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이 있다.

둘째,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1494~1558] 종가이다. 야계 송희규 종가는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고산정 마을에 있고, 500여 년을 대대로 살아왔다. 시조 송맹영(宋孟英)의 9세손이자 송희규의 6대조 송구(宋構) 대부터 성주 소래에 정착하였다. 송희규의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이다. 할아버지는 송소(宋紹), 아버지는 송방현(宋邦賢), 어머니는 황진(黃珍)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현풍현감·호조정랑·흥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의 장계에 의해 효자로 정려를 받았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 고산현으로 유배를 갔고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풀려난 후에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송희규의 아들 송현(宋鉉)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손자 송유경(宋惟敬)은 생원에 입격하였으며, 증손 송광정(宋光廷)과 송광계(宋光啓) 형제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성주의 명문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셋째, 동강 김우옹 종가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 2리에 속한 사도실[思道谷]에 있다. 사도실 마을에는 달성 배씨(達城裵氏) 배혜(裴惠)가 처음 입향하였고, 그의 사위 김계손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김계손이 바로 의성 김씨 입향조이다. 김계손의 증손 김희삼(金希參), 김희삼의 아들 김우옹, 김우옹의 13세 종손 김창숙(金昌淑)이 사도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김우옹은 1540년(중종 35) 성주 사도실에서 김희삼과 청주 곽씨(淸州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이다. 오건(吳健)과 조식(曺植)에게 배웠고, 조식의 외손녀 상주 김씨(商州金氏) 아내로 맞이하였다.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홍문관 정자·이조 좌랑·병조참판·대사헌·이조참판·예조참판 등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에게 수학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을 받았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맡으면서 명나라와의 관계에 힘썼으며 선조를 호종하였다.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 동인 쪽과 가까웠고, 1574년(선조 7)에는 정구(鄭逑)[1543~1620]를, 1595년(선조 28)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명을 천거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등에 제향하였다.

넷째, 한강(寒岡) 정구 종가이다. 고려 중기의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한다. 정구의 할아버지 정응상(鄭應祥) 대에 영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이자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응상의 아들 정사중(鄭思中)이 어머니를 모시고 외할머니가 계시던 현풍 솔례촌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영남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과 혼인하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으로 이거하였다.

정구는 정사중과 성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이다. 오건과 이황(李滉), 조식 등을 스승으로 모셨다. 1573년(선조 6)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1580년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고, 이후 동복현감·함안군수·우부승지·강원도관찰사·안동부사·형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정구는 본인이 부임하는 고을마다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계축옥사 때 영창대군을 구하고자 하였고,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625년(인조 3) 문목(文穆) 시호를 받았다. 성주의 회연서원천곡서원 등에 제향하였다.

다섯째,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1568~1639] 종가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 1리에 있는데, 마을은 홈실이라고 불린다. 홈실 마을에 살고 있는 가구 중 80% 정도가 벽진 이씨(碧珍李氏) 일족이다. 벽진 이씨는 나말여초 호족이었던 벽진 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悤言)이 시조이고,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거주하였다. 이언영의 가문은 시조의 11세인 이견간(李堅幹)의 산화공파 후손이자 산화 5파 중 셋째인 감무공파(監務公派)에 속한다. 여기에서 이언영 자신이 완정파(浣亭派)라는 하나의 지파를 만들었다.

이언영의 본관은 벽진,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석정·완정(浣亭)·운계(雲溪)이다. 아버지는 이등림(李鄧林)이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최호(崔湖)의 딸이다. 성주 팔거현(八居縣)[현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서 태어났고, 1601년(선조 3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03년 장원 급제를 하였다. 성균관 전적·공조 좌랑·병조 좌랑·경상도사·강원도 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정온(鄭蘊)을 비호하다가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削奪官爵)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진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경상우도 의병장이 되었고, 강화도로 가서 세자를 호종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여섯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종가이다. 성산 이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 이능일(李能一)로, 태조 왕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현손 이견수(李堅守)는 성주 벽진면 봉계리에 거주하였고, 이견수의 8세손 이문광(李文廣)은 지인주사(知仁州事) 이여충(李汝忠), 김산군사(金山郡事) 이여신(李汝信), 좌정언(左正言) 이여량(李汝良)의 세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인주공파, 김산공파, 정언공파의 파조가 되었고, 성주 한개 마을성산 이씨들은 모두 정언공파로, 한개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산 이씨이여량의 아들 이우(李友)이다.

이원조의 본관은 성산,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이다. 할아버지는 이민겸(李敏謙), 아버지는 이형진(李亨鎭),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난경(朴鸞慶)의 딸이다. 후에 백부인 정언 이규진(李奎鎭)의 양자로 들어갔다. 1809년(순조 9) 을과로 급제하였고, 승정원 주서가 되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승문원 저작·사헌부 감찰·사헌부 지평·이조정랑·결성현감·강릉부사·제주목사·경주부윤·공조판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향리와 군관을 단속하고 향교 교육을 활성화시켰다.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종가 문화의 한 장면-불천위 제사]

성산 이씨 응와 이원조의 불천위 제사일은 음력 8월 2일이다. 제관들이 모이면 집사분정(執事分定)을 한다. 초헌관(初獻官)은 종손이, 아헌관(亞獻官)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명망이 있는 사람이나 문중 사람이 담당하며, 종헌관(終獻官)은 문중의 연장자가 한다. 대축(大祝)은 초헌관이 술을 따르면 옆에서 축문을 읽고, 집례(執禮)는 홀기(笏記)를 읽는다. 진설(陳設)은 음식을 차리고, 봉향(奉香)·봉로(奉爐)·봉작(奉爵)은 향로와 술잔을 올리며, 사준(司罇)은 초헌관·아헌관·종헌관에게 술을 올린다.

1차 진설 설소과(設蔬果)가 끝나면 신주를 사당에서 모셔 와서 교의(交椅)에 안치한 후 신주의 뚜껑을 열고 주독(主櫝)을 씌운 도자(韜藉)를 벗긴다. 신주를 모신 후에 혼백을 부르는 강신(降神), 신주에 인사를 올리는 참신(參神), 2차 진설 진찬(進饌), 초헌관이 술을 올리는 초헌(初獻), 대축이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 아헌관이 술을 올리는 아헌(亞獻), 종헌관이 술을 올리는 종헌(終獻), 음식을 드시기를 권하는 유식(侑食), 병풍으로 제상을 가려 음식을 드시게 하는 합문(闔門), 국그릇을 숭늉으로 교체하는 진다(進茶), 신을 보내는 절차인 사신(辭神), 여러 제구들을 정리하는 철상(撤床), 음식을 제관들이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의 절차를 시행하면 끝이 난다.

제사의 제수는 일반 기제사보다 풍성하지만 화려하지 않다. 과일은 대체로 8가지를 올리고 상황에 따라 짝수로 줄인다. 탕은 보통 어탕과 육탕, 두 가지가 있고, 적은 도적(都炙)과 어적(魚炙), 치적(雉炙)을 쓴다. 떡은 대두고물편과 송편 등을 쌓는다. 응와 이원조 가문의 특징적인 제수로 집장(汁醬)이 있는데, 반가(班家)의 전통 음식이다.

여기에서 다른 가문과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강후참(先降後參)이다. 혼백을 먼저 부르고 신주에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둘째, 제주가 분향과 뇌주(酹酒) 때 각각 재배한다. 분향은 하늘의 혼을 부르는 절차이고 뇌주는 땅의 백을 부르는 절차이다. 혼이라도 오셨으면 먼저 절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셋째, 헌관이 향로 위에서 술잔을 돌리거나 젓가락을 음식 위에 올리지 않는다. 넷째, 일반 기제사에서 아헌은 종부가 올리지만, 불천위 제사에서는 하지 않는다. 이는 불천위 제사는 공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성주 종가의 삶]

성주 벽진 이씨 완석정 이언영 종가의 종손과 종부를 예로 들어 살펴보겠다. 선 종손 이영기(李灐基)[1915~1994]는 이언영의 12세 종손으로 자는 문숙(文淑), 호는 석운(石云)이다. 벽진소학교와 성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공직 생활을 하였다. 농업학교 재학 중에 항일 운동으로 감옥에 갔고, 학교를 마친 후에는 10여 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유림 단체의 간부를 지냈고 자동서원(紫東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종택의 문화재 지정을 돕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부인 서흥 김씨(瑞興金氏) 김정식(金貞埴)[1914~2001]과의 사이에 아들 이종건(李鍾健), 이석우(李錫寓), 이석재(李錫宰)와 딸 둘을 두었다.

선 종부 서흥 김씨 김정식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후손인 유학자 김희준(金熙準)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언문을 익혀서 문장에 능하였고, 광복 전후에는 동네 처녀들에게 언문과 부도(婦道)를 가르쳤다. 60여 년간 종택을 지키며 많은 제사를 치르고 손님을 대접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보살폈다. 또한 전통에만 구속되지 않고 현대 사회에도 잘 적응하며 모범적인 종부의 삶을 살았다.

완석정 이언영의 13세 종손 이종건의 자는 성일(誠一), 호는 벽파(碧坡)이다. 일찍이 한학을 배웠고 1949년 경북중학교, 1955년에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가 1997년 정년퇴직하였다. 1980년 45세 때부터 아버지의 병으로 완석정 종가를 이끌었다. 1963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14세 종녀인 류정하(柳貞夏)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현대의 삶과 종가 문화가 공존하려면, 종손은 현직에 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하고 퇴직 후에는 종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차종손(次宗孫)이 충분한 소양과 준비를 갖출 때까지 종손이 건강을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종가를 관리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부 류정하는 성균관 부관장 류시영(柳時泳)과 무안 박씨(務安朴氏) 박필술의 장녀이다. 10여 년간 공직 생활을 하면서 봉제사 접빈객의 종가 일에 전념하였다.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 하회 충효당(安東河回忠孝堂)[보물]을 방문하였을 때 여왕을 접대하였고, 선물로 기증한 자수 작품은 대영제국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011년에는 경상북도 지역 종부 단체인 경부회(慶婦會) 회장을 역임하면서 종가 문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가 문화의 계승과 활용]

기존에는 종가 문화의 계승에 대해 주로 종가나 고택을 문화 자원이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종가 문화의 계승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종가와 종가 문화는 하나의 문화 관광 상품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전통문화와 유교 문화의 형식을 보존하고 실천하는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종가는 그곳에만 존재하는 인물, 역사, 유물, 정신, 의례, 성씨와 인물, 민속 의례와 음식, 구전과 일화 등의 중요한 문화들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 종가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공간과 구성 요소를 공유하면서 존재한다. 전통 마을에는 종가와 재실 등의 건축 유산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문화와 민속 생활문화도 함께 있다. 이러한 것들을 함께 아우른다면 종가 문화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종가 문화가 후대에 계승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첫째, 종가 문화의 자부심과 긍지, 자존감을 먼저 확보하고, 종가 문화에 대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종가 문화는 우리 문화의 기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각 종가가 가진 특수한 전통과 문화를 정리하고, 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종가 문화의 전통성과 상징성, 종가의 역사와 유적, 대표적인 인물, 종손과 종부, 종가의 특징적 문화 등과 관련된 사료 및 물질 자료, 무형 자료 등을 모아서 정리하고, 이러한 자료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콘텐츠화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높인다. 또한 건축물이나 음식 문화, 제사 의례 등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 정신문화, 생활 등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셋째, 수요층별로 다양한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세대별, 성별, 지식 수준, 내국인과 외국인 등에 따라 종가 문화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각각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여 종가 문화를 알리는 것이 좋다. 넷째, 정부뿐만 아니라 지자체, 언론계, 기업체, 교육계, 문화 시민 단체 등 사회 각 분야의 관심과 지원이 더욱 필요하다. 다섯째, 각 종가와 문중에서도 종가 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종택과 묘소, 재실의 관리, 손님 접대와 안내, 종가 문화 교육 등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기구를 만들어서 잘 운용한다면 종가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성주 종가 문화의 의의]

우리나라에서 종가 개념은 대체로 조선 중기부터 형성되어 18세기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주의 종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1937년에 간행된 『성산지』 인물편에는 고려 시대의 인물 60여 명이 나오는데, 대체로 고려 개국 공신을 시조로 하고, 시조 이후 몇 대까지는 일직선으로 내려온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고려 후기의 인물들이 많이 기재된 것은 조선 건국을 전후로 역사 기록이 풍부해졌기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 인물 중에는 벽진 이씨성주 이씨 두 가문이 가장 많았다. 그 밖에 성산 이씨, 성산 배씨, 경산 이씨(京山李氏), 가리 이씨(加利李氏), 성주 도씨(星州都氏), 광평 이씨(廣平李氏), 성산 여씨(星山呂氏) 등 성주의 지역명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들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다른 지역을 관향으로 삼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순천 박씨(順天朴氏) 박가권(朴可權),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구, 의성 김씨 김용초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본인이 실제로 성주에 거주한 경우도 있었고, 본인이 성주에 살지는 않았지만 후손들이 세거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성주는 한강 정구동강 김우옹을 배출한 곳이다. 두 사람 모두 이황과 조식의 제자로, 학문을 익혀 벼슬에 나아갔다. 성주의 선비들은 이들의 제자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그 문인들의 자손들은 자신의 선조가 양강의 문인임을 드러내었다. 성주의 많은 종가들이 양강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비록 양강의 문인은 아니지만 저명한 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장한 인물의 가문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인물의 자손, 학문과 덕행으로 성장한 가문 등도 종가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성주의 종가들은 지역 사회를 주도하고 성주의 문화를 꽃피웠으며, 이로 인해 성주에서 학문과 덕행이 더욱 성장하였다.

종가는 500여 년 이상 한국의 유교 문화와 전통문화를 계승한 역사·문화의 총체적 산물이다. 종가의 주요 구성원이자 종가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종손과 종부의 삶은 문중을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쳤고, 종족 내부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문화를 선도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따라서 종손과 종부는 조상의 말씀과 가문의 규율을 계승·실천하면서 문중 전체와 지역 사회의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올 수 있었다. 또한 종족 안의 구성원들을 잘 보살펴야 했고, 종가와 관련된 종족 외의 사람들에게도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어야 했다. 이를 기반으로 종가 문화는 전통문화를 보존, 유지,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우리 사회에 전해지고 있는 건물, 고문서, 문집, 서책, 제례, 음식 등 문화재의 많은 부분이 종가를 통해 전승·보존되어 왔다. 따라서 종가 문화는 우리에게 규범의 기준을 제공하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민족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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