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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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周獻 |
이칭/별칭 | 문보(文甫),의재(宜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할아버지는 남공보(南公輔)이고, 아버지는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정3품 당상)을 지낸 남인구(南麟耈)이며, 어머니는 윤상후(尹商厚)의 딸이다.
[활동사항]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 세마(洗馬),호조좌랑(戶曹佐郞),감찰(監察) 등을 거쳐 함양(咸陽), 무주(茂朱), 남원(南原), 임천(林川) 등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면서 주로 외직을 맡아 치적을 남겼다. 특히 1808년(순조 8) 함양 군수 재직시 암행어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서(陞敍)되고 1810년(순조 10)에는 남원 현감으로 있으면서 굶주린 백성들의 진휼에 힘쓴 공으로 표창을 받았다.
여러 외직을 두루 거친 이후인 1814년(순조 14) 정시(庭試) 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주요 청요직을 맡았다.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을 거치며 검토관(檢討官) 등을 역임하였고,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 관례(冠禮)에 선교관(宣敎官)으로 참여하였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당상관이 되었다. 그뒤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고 승지(承旨)를 거쳐 춘천부사(春川府使)를 끝으로 사직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의재집(宜齋集)』이 있다.
[묘소]
묘는 성남 분당구 율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