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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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雲翼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Jang Unik Memorial 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권 |
건립 시기/일시 | 1689년 11월 - 장운익 신도비 손자 장선충이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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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60년대 - 장운익 신도비 서울특별시 성동구 방배동에서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조남리로 이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1년 - 장운익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9년 6월 14일 - 장운익 사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6년 3월 3일 -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지정 |
현 소재지 | 장운익 신도비 -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조남동 산1-5] |
원소재지 | 장운익 묘와 신도비 - 서울특별시 성동구 방배동 |
성격 | 정운익 신도비 |
관련 인물 | 장일|장유|장신|장선징|장선충|김상헌|최석정|신익상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81㎝[총 높이]|112㎝[이수 높이]|194㎝[비신 높이]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장운익의 신도비.
[개설]
장운익 신도비(張雲翼神道碑)는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인 장유(張維) 선생 묘 및 신도비 뒤쪽에 있다. 원래 장운익(1561~1599)의 묘소와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방배동[지금의 서초구 방배동]에 있었는데, 1960년 도시 개발로 묘를 잃게 되고 신도비만 있던 것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조남리[지금의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마을의 아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묘소 주변으로 옮겨 세웠다. 장군재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국구(國舅)였던 장유의 사패지(賜牌地)로서 마을 이름을 장유의 성씨와 군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서남쪽 쇠머리산[높이 70m] 정상에 손자 풍양군(豊陽君) 장선징(張善澂)의 묘가 있다.
장운익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시호는 정민(貞敏).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낸 장일(張逸)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뒤 양양부사(襄陽府使)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죽은 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봉해졌다.
[건립 경위]
장유는 1635년(인조 13) 처의 작은아버지인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상헌(金尙憲)에게 부탁하여 ‘형조판서장공묘비명(刑曹判書張公墓碑銘)’을 짓고 병으로 벼슬을 떠나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안골마을]에 머물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상과 셋째 동생 덕창군(德昌君) 장신(張紳)이 자진(自盡)하는 등의 일로 아버지 장운익의 비를 세우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후 55년이 지나 장신의 장남 장선충(張善沖)에 의해서 1689년(숙종 15) 11월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장운익 신도비는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에 있다. 시흥시에서 인천광역시로 가는 국도42호선 오른쪽으로 장군재마을로 들어서서 수인로 2216번길로 올라가면 응단말 동측 산언저리에 장유 묘가 있고, 그 뒤쪽 구릉에 장운익 신도비가 있다.
[형태]
장운익 신도비의 총 높이는 381㎝이며 방부이수(方趺螭首)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수(螭首)의 높이는 112㎝이며 앞면에는 쌍룡쟁주(雙龍爭珠)를, 뒷면에는 단룡롱주(單龍弄珠)를 화려하게 조각하고 방부에는 복련(覆蓮)과 당초문(唐草紋)을 장식하였다. 이수와 한몸인 애석(艾石)으로 만든 비신(碑身)은 높이가 194㎝이며 앞뒤 면에 비문을 새겼는데 비문의 상태는 양호하다.
[금석문]
전액(篆額)을 ‘형조판서증영의정장공신도비명(刑曹判書贈領議政張公神道碑銘)’이라 올리고 비석의 제목을 ‘유명조선국자헌대부형조판서겸오위도총부총관증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덕수부원군장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資憲大夫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摠管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德水府院君長公神道碑銘幷序)’라 하여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밝히고 있다.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대사헌(大司憲) 신익상(申翼相)이 썼다. 전액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최석정(崔錫鼎)이 쓰고 추기(追記)는 장선충이 지었다. 건립 연대는 ‘숭정기원무진후62년기사[1689년(숙종15)]십일월○일립(崇禎紀元戊辰後六十二年己巳十一月○日立)’이다.
[의의와 평가]
장운익 신도비는 조선시대 분묘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서인의 중심 인물인 김상헌의 문장을 신도비명에서 확인할 수 있고, 당대 문신이자 학자였던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최석정의 전액은 서예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 밖에 관련 인물들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시흥시 장곡동에 세거하였던 덕수 장씨(德水 張氏)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