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49
한자 尹趾完
영어공식명칭 Yun Jiwan
이칭/별칭 숙린(叔麟),동산(東山),충정(忠正),일각정승(一脚政丞)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윤지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윤지완 낙향
몰년 시기/일시 1718년연표보기 - 윤지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22년 - 윤지완 숙종의 묘정에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 윤지완 영평위 사당에 배향
거주|이주지 동산골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묘소|단소 황해북도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사당|배향지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
사당|배향지 영충사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53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파평
대표 관직 우의정

[정의]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윤지완(尹趾完)[1635~1718]은 1662년(현종 3)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1673년(현종 14) 설서(說書)를 시작으로 어영대장, 예조판서,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좌참찬, 우의정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고향 안산 동산골[지금의 안산시 원곡동]에 내려와 살다 84세로 사망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고조할아버지는 윤지함(尹之諴)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고, 할아버지는 성혼(成渾)의 제자 윤민헌(尹民憲)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윤강(尹絳)이고, 어머니는 지돈녕부사 정광성(鄭廣成)의 딸이다. 맏형 윤지미(尹趾美)는 부제학을 지냈고, 둘째 형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은 숙종 재위 기간 형제간 정승으로 유명하다. 넷째 동생은 황주목사 윤지경(尹趾慶)이다. 다섯째 동생은 병조판서 윤지인(尹趾仁)이고, 막냇동생은 주부(主簿) 윤지희(尹趾禧)이다. 시흥의 인물로 수암면 3.1운동을 이끈 윤동욱(尹東旭)이 직계 후손이다.

[활동 사항]

윤지완은 1657년(효종 8) 생원 및 진사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1670년(현종 11) 처음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못하였다. 1673년(현종 14) 설서를 시작으로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지평(持平)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해 경연(經筵)에서 당쟁의 폐단을 간하고, 덕원으로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의 죄가 없음을 건의하여 집권당인 남인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부교리에 등용되어 부응교(副應敎),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 8)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어영대장, 예조판서,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 등 서인이 실각하면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폐비 민씨[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하며 지지한 소론이 등용되자 좌참찬과 우의정에 올랐으나 한쪽 다리를 잃은 뒤, 67차례 인책(引責)과 79차례 상소(上疏)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길 원하였다.

숙종이 친히 만류하였으나 끝내 사직하고 고향인 안산 동산골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부모상을 치르며 시묘살이로 다리를 잃은 윤지완을 '일각정승(一脚政丞)'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윤지완을 아낀 숙종은 어의(御醫) 백광현(白光炫)을 보내 치료해 주는 등 수시로 건강을 살폈다. 1704년(숙종 30) 영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06년(숙종 32) 조정에 추곡(楸谷)[가래울마을, 지금의 시흥시 화정동]에 살던 정제두(鄭齊斗)를 천거하였다. 정제두는 같은 소론이고 문과 급제자가 아니었으며, 이단이던 양명학을 한 사류(士類)였다. 특히 윤지완정제두의 스승인 박세채(朴世采)와 소론을 이끈 중신이었고,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은 성혼의 외증손자이자 작은할아버지 윤민일(民逸墓)의 외손자였다. 그리고 사위 박심(朴鐔)도 윤증의 제자이자 정제두와는 친구로 정제두추곡으로 가자 정제두를 따라 안산 처가가 있는 이웃한 지포(芝浦)에 와서 살았다. 당시 정제두는 박심에게 편지를 보내 윤지완의 안부를 묻는 등 교류하였다.

1709년(숙종 35) 할아버지 윤민헌의 묘갈명을 짓고 배다른 동생 윤지인과 묘갈을 산현동 묘에 세웠다. 윤지인은 1717년(숙종 43) 윤지완이 병이 나자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한걸음에 안산을 찾았다가 파직되었다. 윤지완은 1717년(숙종 43) 영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숙종이 좌의정 이이명(李頤命)과 독대를 하고,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 82세 나이로 널[棺]을 지고 서울에 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이이명의 독대를 비판하고 세자 청정을 미룰 것과, 재상과 대신을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묘소]

묘소는 처음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썼는데 1725년(영조 1) 조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어부들이 상소하여 황해도 개성의 오관산으로 이장하였다. 영조는 윤지완의 묘를 옮기자 군정(軍丁)과 장수(葬需)[장례 비용]를 내려 예우하였다.

[상훈과 추모]

윤지완의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종묘 배위에 대한 영조·정조 재위 기간 철거, 출향 등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숙종이 아낀 중신이었기 때문에 윤허되지 않았다. 또한 묘소가 멀리 있어 안산 동산골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다가 1987년 파평 윤씨(坡平尹氏) 영평위공파(鈴平尉公波) 종회에서 시흥시 산현동에 영평위 사당을 새롭게 짓고 함께 배향하면서 숭모각(崇慕閣)으로 했다가 영충사(鈴忠祠)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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