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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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薛氏夫人勸善文 |
이칭/별칭 | 『설씨 부인 권선문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가남리 518-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태훈 |
제작 시기/일시 | 1482년 - 설씨부인 권선문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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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7월 15일 - 설씨부인 권선문 보물 72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설씨부인 권선문 보물 재지정 |
현 소장처 | 국립 전주 박물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효자동 2가] |
원소재지 | 유장각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34 |
성격 | 절첩장 |
작가 | 설씨 부인(薛氏夫人) |
소유자 | 고령 신씨 귀래공파 종중 |
관리자 | 국립 전주 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조선 전기 순창 출신의 설씨 부인이 지은 선을 권하는 글과 그림.
[개설]
설씨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은 성종조 대사간을 지낸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정부인 설씨(薛氏)[1429~1508]가 지은 것이다. 설씨는 사직(司直) 설백민(薛伯民)의 딸로 1429년(세종 11)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여성으로서의 문장과 필재(筆才)가 탁월하고 정숙한 덕성을 갖추어 덕망이 높았다. 또한 불교와 유교에 조예가 깊고, 서화에도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다. 설씨 부인은 1482년(성종 13) 봄 간밤의 꿈이 신험(神驗)함을 생각하고 손수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강천산의 아름다운 경계 속에 세워질 암자의 설계도까지 그려 부도암(浮圖庵)[순창군 강천사의 전신]의 승려 약비(若非)로 하여금 많은 불신자들에게 돌려 시주를 구하게 하였다.
설씨부인 권선문은 부도암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절이 쇠락하면서 스님이 신말주의 18세손인 신승재에게 돌려주어 대대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본래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고령 신씨 본가 안에 세워진 보호각인 유장각(遺藏閣)[1990년 건립]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는 국립 전주 박물관에 위탁한 상태이다.
[형태 및 구성]
설씨부인 권선문은 1첩 16폭의 병풍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권선문은 전문이 1,103자인데 원래는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것을 후손이 오래 보관하기 위해 한 폭에 4행 또는 5행으로 된 첩지를 16폭으로 나누어 병풍과 같이 접어 두는 족자로 만든 것이다. 크기는 가로 19.8㎝, 세로 40㎝로, 펼쳐 놓으면 317㎝가 되며 6겹으로 배접하여 만든 첩면에 붓글씨로 쓴 권선문 14폭과 채화 2폭을 붙여서 만들었다. 즉, 전체 16폭 가운데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은 사찰의 채색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 내려오던 편지글과 권선문이 쓰여 있다. 또한 ‘성화 18년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예인(藝印)이 찍혀 있다. 성화 18년은 1482년(성종 13)이다.
권선문은 첫머리에 불교의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을 내세운 다음, 돌아가신 어머니 형씨 부인(邢氏夫人)의 현몽과 중조(中照) 스님의 명을 받은 약비가 부도암 중수에 대한 요청을 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공개한다. 그렇게 큰 경비가 들지 않아 혼자서도 보시할 수 있으나 대중들이 부도암 중수에 동참하는 선을 행하여 다 같이 응보의 복을 받도록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래는 권선문 전문이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의 인과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선악의 업을 짓는 것이 인연이 되어 이로 인한 타일(他日)의 과보가 있게 된다고 한다. 내가 여성으로 그 참된 묘리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난 옛날의 불적(佛跡)을 고찰하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자비행으로 가르치고 인과법으로 요유(擾柔)하여 중생을 제도하므로 비록 역대의 명왕(明王), 철후(哲候), 현경(賢卿), 준사(俊士)가 모두 교풍에 따라 부처님을 앙모하고 불사를 궁행(躬行), 복습(復習), 정근(精勤)함으로써 능히 속세의 사마(邪魔)를 물리치고 진세(眞世)를 깨닫는 길에 나아가는 자가 끊임없이 계속함을 보면 불교 신앙이 이로움이 없다면 어찌 이러한 형적이 나타나리오.
그래서 나도 평소에 이를 믿고 기꺼이 따르는데 금년 봄 어느 날 밤 꿈에 작고하신 어머니 형씨가 하관(霞冠)을 쓰고 운거(雲裾)를 날리며 허공에서 내려와 나를 향하여 앉아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명일(明日)에 어떤 사람이 와서 선한 사업을 함께 하자고 청할 것이니 모름지기 마음으로 즐겁게 따르고 게을리 하는 뜻을 갖지 말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원인이 되리라.’ 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꿈이 깨어 일어나 앉아 날 새기를 기다렸더니 아침때가 되기 전에 문밖에서 사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사람을 시켜 나가 본즉, 근리(近里)에 사는 평소에 잘 아는 ‘약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맞아 찾아온 연유를 알아본 즉 본군(本郡) 광덕산(廣德山) 중에 산수가 가장 청려(淸麗)한 곳이 있어 옛날에 ‘신령(信靈)’이라는 중이 이곳에 잠시 초사(草舍)를 지어 부처님을 모셨는데 다년간의 한서와 풍우에 표요(漂搖)되어 옥사(屋寺)가 파괴되고 장원(墻垣)이 퇴락하여 마침내 빈터가 되어 운산연수(雲山烟水)에 영원한 한을 남긴 채로 있었다. 그런데 뒤에 중조(中照)라는 뜻있는 중이 있어 여기에 사찰을 중창할 뜻을 세우고 불자들에게 널리 권하여 원납전(願納錢)을 거둘 때에 약비도 적은 성납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불전을 신축하여 단청을 마치고 절 이름은 옆에 부도가 있음을 빌어 부도암이라 하니 그 규모는 비록 작다 해도 도량이 청정함은 어느 사찰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 고명한 인사들이 진경에 처하면서 심성 수양을 목적하고 즐거이 찾아 들었는데 오직 한스러운 것은 창사 당시에 너무 바삐 서둘러 공사가 거칠고 기초가 견고하지 못한 탓으로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지금은 기둥이 기울어지고 건물이 퇴락하였다. 중조가 이를 개축코자 뜻하지만 힘이 미약하여 감히 발의를 못하는 터였다.
약비가 말하기를 ‘듣자오니 부인께서 이런 일을 좋아하신다 하는데 여기에 시주를 허락하시려는지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어젯밤 꿈이 상기되면서 대체 이런 기험한 일이 또 있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시에 영명(英明)한 자질이 있어 온갖 착한 일만을 하고 악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필시 상계(上界)의 존귀한 자리에 계시면서 미래의 운수까지 소명하게 알아서 나에게 이 선업을 알려 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일은 내가 즐거워하는 바인데 하물며 어머님이 명하는 것을 거역하겠는가. 내가 이 일에 주간이 되어 하나의 원당을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이 암자의 작은 규모로 보아 이에 수요되는 재정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나 혼자만의 재력으로 담당하기가 어려우리요마는,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천만인이 원(願)을 같이 함으로써 뒤에 복된 업인을 맺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세인들이 한이 없는 욕심에 쫓겨 몸이 마치도록 생활에 골몰하는 바람에 능히 이러한 보시에 출원을 못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능히 천하의 모든 사람을 다 효유(曉諭)하여 선업을 짓게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불경에 이르기를 고사(古寺)의 수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는 두 범천(梵天)에 나아갈 복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공덕을 쌓는 일을 함에 있어서 선한 근기를 맺게 되고 둘째는 신자(臣子)가 되어 인군과 어버이에게까지 복을 받게 될 것이니 이러한 고사 보리(補理)의 시주를 버리고 더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만약에 참으로 불심이 있는 사람이 이 일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이 선인(善因)에 참여하여 크게는 인군과 어버이에게 복되게 하고 작게는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나아가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이르고자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 일을 여러 불신자들에게 알리고 또 이러한 뜻을 가지는 사람에게 효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내 자신이 직접 나아가 다니면서 널리 권유를 한다는 것은 여자로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 권선문을 지어 중조 스님으로 하여금 널리 권선을 구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사를 물었더니 약비가 대답하기를 ‘이것이 곧 자기와 중조 스님이 부인에게 원하는 바라.’ 하기에 나는 곧 광덕산 부도암의 도형을 그리고 권선의 글을 써서 나의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 보여 무릇 나와 같이 불심을 받드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보고 각자의 의향에 따라 시주에 응함으로써 이 업인에 동참하면 심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혹 이러한 불교의 이치를 믿지 않고 나의 말을 일종의 무언(誣言)이라 보는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다음에 불교의 인과보응설이 실제적으로 험증되는 사실로써 쉽게 탐비할 수 있는 근대의 사건을 들어 그 대강을 말하고자 한다. 여말에 한 동량승이 옥륜사(玉輪寺)를 개수하면서 금상불을 주성하려고 원납전을 구할 즈음에 신자와 서민들이 다투어 시주를 하였다. 그때 한 늙은 산장관(散將官)이 시주할 뜻은 있었으나 지극히 가난하여 시주할 재물이 없기 때문에 13세 된 여식을 사역승(使役僧)으로 바치면서 수납하기를 간곡히 원하므로 하는 수 없이 받아 들였다. 이때에 장군으로 재직한 사람이 연로한데도 아들이 없어서 사역승으로 바친 여아를 양녀로 사 가는데 대가로 포 500단을 그 아버지 산장관에게 지급하여 궁핍을 면하는 즉보(卽報)를 받게 되었다.
또 최시중(崔侍中)이라는 사람은 집 근처에 절이 있어 매양 관청에 갈 때나 돌아올 때에 사문(寺門)에 이르면 곧 말에서 내려서 절을 향하여 배례를 하고 보행으로 절 앞을 지난 뒤에 말에 오르며, 과일이나 곡물 등 새로운 것을 먼저 불전에 올리고 혹 원당에 나아가면 손수 차를 다려 불전에 공양하기를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섬기는 것이 근실하다. 그러나 남리응양부에 사는 노병(老兵)의 신심은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본 즉 과연 한 노병이 있었다. 그가 직접 노병을 찾아가서 그대가 이웃 절의 부처님에게 올리는 특별한 치성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중풍으로 일어나지 못한지 7년이라 다만 새벽과 저녁에 이웃 절의 종소리가 들리면 그 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을 뿐이라.’라고 하였다. 그 노병을 중하게 대우하여 매양 녹을 받을 때마다 1곡[16두]의 쌀을 주었다. 여기에서 저 산장관이 여아를 바친 지성이 당시에 부(富)의 보(報)를 받게 되고, 불구의 노병이 합장한 치성은 일생의 생계에 도움을 받은 응보가 있었음을 본다면 나의 말이 헛된 무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뜻에서 감히 이를 증언으로 한다.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
[특징]
설씨부인 권선문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또한 10번째의 절접(切椄)은 5행 중 2행이 손상되어 다른 사람의 글씨로 후대에 보사(補寫)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서체는 여인의 글씨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한 행서(行書)로 쓰였는데, 조선 시대 전기에 풍미했던 원나라의 조맹부체(趙孟頫體)를 방불케 한다. 또한 이 설씨부인 권선문은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불교 인과법에 의한 글이라는 점에서 불교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조선 초기 사대부의 집안 여인이 사찰의 중창 불사에 관심을 보인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의의와 평가]
설씨부인 권선문에 대한 평가는 정인보(鄭寅普)[1893~1950]가 남긴 『담원 문집(薝園文集)』 제1권에서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정인보는 1934년 순창까지 내려가 이 설씨부인 권선문을 확인하고, 기승전결과 같은 논리의 전개가 법도에 맞는 진고문(眞古文)이라고 평하며, 이제까지 법도를 구비한 글의 시조로 꼽히는 계곡(溪谷) 장유(張維)[1587~1638] 보다 앞서 이러한 법도를 구사한 설씨 부인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 설씨부인 권선문을 과학적 방법으로 모사 복원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뛰어난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