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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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山二水-中心-文化特區-飛翔 |
영어공식명칭 | Center of Samsanisu, Soar to the Culture Zone |
영어음역 | Center of Samsanisu, Soar to the Culture Zone |
영어공식명칭 | Center of Samsanisu, Soar to the Culture Zon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삼산이수로 둘러싸인 전라남도 순천시 중심부의 문화적 특색과 의미.
[개설]
순천 사람들은 예로부터 순천을 ‘소강남(小江南)’이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고 자부해왔다. 물론 순천 사람들만 순천을 ‘소강남’이라 부른 것은 아니고, 그 명칭이 최근 생긴 것도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미, “산과 물이 기이(奇異)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이라고 일컫는다.”라는 말이 보인다. 산과 물이 아름다워 중국의 강남 지역에 비길만하다는 말이다. 중국인들이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下有蘇杭)”, 즉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라고 자부한다는 쑤저우와 항저우보다, 조선의 순천이 그리 뒤처지겠느냐 하는 자부심을 내비친 말이다. 이처럼 소강남이 되려면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야 한다.
[순천은 삼산이수의 땅]
순천시에서 삼산·이수라는 명칭은 삼산중학교[순천시 매산큰길 23 소재], 순천이수중학교[순천시 수박등1길 13 소재] 등 중학교 교명으로 쓰였다. 또한, “삼산은 높이 솟았고 이수 감돌아 흐르는 곳”처럼 순천고등학교의 교가뿐 아니라 순천여자중학교·삼산중학교·이수중학교 등 순천 소재 여러 학교 교가에도 나온다. 이처럼 삼산·이수는 순천시민의 문화와 생활 속에 그대로 녹아든 어구인 셈이다. 그 구체적인 산과 물의 실체가 ‘삼산’과 ‘이수’이다.
그런데 정작 삼산과 이수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문헌에서도 분명하게 밝혀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순천의 삼산과 이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혹자는 용당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을 삼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산이 마주 보이는 동네 이름이 삼산동이고, 맞은편 언덕에 있는 중학교는 삼산중학교이다. 그리고 옥천과 동천을 이수라고 한다. 동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에 학교를 짓고 순천이수중학교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삼산이 인제산, 원산, 비봉산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는 인제산, 해룡산, 진례산이 삼산이고, 동천과 이사천이 이수라고 한다.
사실 ‘소강남’이란 말이 중국에서 유래했듯이, ‘삼산이수’란 말을 만든 것은 중국인이었다. 그것도 중국이 자부하고 사랑하는 시인, 이백(李白)이 만든 말로서, 황학루와 봉황대와 같은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먼저 무대에 선 것은 황학루이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더불어 강남 3대 누각의 하나였다. 이백보다 먼저 황학루에 온 최호(崔顥)라는 시인은 ‘황학루’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노래하였다.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 버렸고[昔人已乘黃鶴去]
여기엔 황학루만 부질없이 남아 있네.[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 번 간 뒤 다시 오지 않고[黃鶴一去不復返]
흰 구름만 천 년토록 부질없이 감도네.[白雲千載空悠悠]
맑게 갠 냇가, 한양 땅 나무들 뚜렷이 보이고[晴川歷歷漢陽樹]
꽃다운 풀은 앵무주에 무성히도 우거졌네.[芳草萋萋鸚鵡洲]
날은 저물었는데 고향 땅은 어디인가?[日暮鄕關何處是]
강가의 안개는 시름만 더하네.[煙波江上使人愁]
최호 뒤에 황학루에 오른 이백은 이곳의 경치에 시흥이 올랐다. 그런데 눈에 들어온 것은 최호의 ‘황학루’. 이백의 시흥은 깨져버렸다. 이보다 더 아름답게 노래를 읊을 수 없다면서, 들고 있던 붓을 던져버렸다. 이로 인해 황학루 옆에는 붓을 던져버렸다는 의미의 각필정(擱筆亭)이 지어졌고, 최호는 불후의 시인으로 기억되었다.
그 후 강남을 주유하던 이백은 어느 날 금릉(金陵)에 있는 봉황대에 올랐다. 그곳의 경관은 형용하기 어려웠고, 이백은 드디어 ‘황학루’를 능가할 절창을 남겼다. 그것이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라는 시다.
봉황대 위에서 봉황이 놀더니[鳳凰臺上鳳凰遊]
봉황은 가고 대도 비었는데 강물만 잘도 흐르네.[鳳去臺空江自流]
오궁의 화초는 유경 속에 묻혔고[吳宮花草埋幽徑]
진나라 관리는 무덤이 되었네.[晉代衣冠成古丘]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졌고[三山半落靑天外]
이수는 백로주로 하여 둘로 나뉘었네.[二水中分白鷺洲]
뜬구름도 모이면 해를 가릴 수 있어[總爲浮雲能蔽日]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시름만 더하네.[長安不見使人愁]
바로 이 시에서 삼산과 이수가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삼산은 중국 금릉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세 개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수는 백로주라는 모래톱 때문에 물길이 갈린 진천(秦川)과 회천(淮川)이다.
[삼산이수는 순천인의 가슴 속에]
이후 중국의 명소를 빗대 이름을 짓곤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때, 흔히 삼산과 이수를 언급했다. 가령, 조선시대엔 봉황대가 있던 금릉과 똑같은 지명을 가진 곳이 있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가 그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김천 사람들은 김천을 ‘삼산이수의 고장’이라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소강남을 자랑했던 순천이라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순천도 소강남답게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훗날의 누군가가 나타나 최호와 이백의 뒤를 이어, 황학루와 봉황대에 필적할 곳에서 불후의 절창을 남길 수도 있다. 그래서 순천도 일찍부터 소강남이면서 삼산이수의 고장임을 자부하였다.
그렇다면 굳이 삼산과 이수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순천을 들러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산이 많다. 산의 수를 헤아리면 세 개를 훌쩍 넘는다. 게다가 금릉에 있는 삼산처럼 봉우리 세 개로 이루어진 산도 있다. 물도 많다. 여러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들은 여기저기서 합쳐지며 동천이 되어 남해로 흘러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삼산과 이수로 지명할 곳만 고르면 된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순천만의 문화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침 순천시에는 삼산 삼호신인(三山三護神人)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세 산에 순천을 보호하는 세 신이 있다는 것이다. 성황산에는 김총, 해룡산에는 박영규, 인제산에는 박난봉이 산신으로 있으면서 순천을 보호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삼산이 굳이 봉우리가 세 개로 된 하나의 산일 필요가 있을까? 순천에서는 성황산, 해룡산, 인제산을 삼산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 또한 마찬가지다. 모래톱으로 갈라진 물줄기만 있으면 그것이 이수 아닐까? 그래도 이왕이면 흐르는 물만 기준으로 하지 말자. 흐르는 물에 사람도 버무리자. 흐르는 물과 거기에 비친 산, 그곳에서 풍광을 노래하고 도의를 논하던 사람들이 있던 곳, 그곳을 이수로 하면 좋을 듯하다. 그러자면 자연히 옥천이 이수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순천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읍성을 휘감아 돌던 옥천, 그곳에는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과 묵객, 선비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래서 옥천을 이수 중 하나로 하면, 옥천이 합류하는 동천도 이수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산과 이수로 둘러싸인 과거 순천부 읍성이 있던 곳, 1980년대까지도 순천의 중심지로 번화함을 자랑하던 곳. 그곳을 순천의 문화 특구로 만들어 도시재생의 좋은 모델로 삼아야 한다.
[전통과 현대가 버무러진 향동]
이제 삼산이수로 둘러싸인, 지금도 순천의 중심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지금은 향동이라 불리는 그곳을 어떤 이들은 ‘문화의 거리’라고 한다. 지금은 쇠락한 모습이지만,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 보면 기묘한 환시를 경험할 수 있다. 조선시대 골목을 걷는 듯 고래등 같은 기와집과 홍살문이 발걸음을 막는다. 이를 뒤로하고 오르막을 오르면 고색창연한 서양식 건물을 만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싶다. 땀을 식히고 내려오면 문인과 화가의 작업실, 조선의 전통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선 노포(老鋪)가 있다. 삼산이수의 고장에 걸맞은 문화의 도시이다.
내친김에 그 내력을 조금 더 알아보자. 조선시대 순천은 향교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순천의 성리학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인물이 나타났다. 무오사화에 연루된 조위(曺偉)와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연이어 순천으로 유배 온 것이다. 그들의 거처는 옥천 근처에 마련되었고, 암울한 세태와 불우한 신세를 잊기 위해 옥천을 자주 산책하였다. 조위는 산책을 좀 더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옥천 적당한 곳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임청(臨淸)’이라 이름 붙였다. 맑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까?
조위는 임청대를 만들고 사람을 불러모았다. 모임 이름은 ‘진솔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의미의 진솔회였다. 김굉필은 회원은 아니었지만, 종종 그들과 어울렸다. 당대의 학자이자 청아한 처신으로 세상의 흠앙[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함]을 받던 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림은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레 순천 선비들의 몸과 마음도 정화했다.
그렇게 4년. 조위는 유배에서 벗어났지만 김굉필은 결국 순천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순천 선비들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얼마 후 이들을 추스를 인물이 순천부사로 부임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고제로 평가받는 구암 이정(李楨)[1512~1571]이었다. 구암 이정은 오자마자 평소 흠모하던 김굉필의 흔적을 되짚고 다녔다. 무너진 임청대를 복구하고, 그 옆에 김굉필을 추모하는 정사를 지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승인 퇴계 이황의 글씨도 받아왔다. 예술적인 풍취는 많지 않지만 단아함이 묻어나는 필체로 쓴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옥천서원과 임청대가 만들어졌다.
구암 이정의 복원사업에 순천 선비들도 있는 힘껏 도왔다. 그리고 옥천서원이 만들어지자 그곳에 모여 학문을 닦았다. 순천 성리학의 중심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친김에 19세기에는 옥천 범람으로 옮겨졌던 향교를 근처로 이건하였다. 향동을 거닐며 만난 홍살문이 있는 그곳이다. 그리하여 향교와 옥천서원을 중심으로 순천의 성리학을 꽃을 피웠다. 지금의 향동은 조선시대 유교 문화 본산이자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하고 말았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땅에서 조선의 색채를 없애려고 하였다. 순천부 관아가 있던 곳을 망치기로 작정하였다. 우선 순천부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을 허물어 버리고,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를 닦았다. 명분은 근대화였다. 그렇게 해서 성터 주변에 공터가 생겨났다.
그 공터를 차지한 이들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었다. 당시까지는 여전히 낯설었던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순천 땅에 발을 딛게 된 계기는 1894년이었다. 1894년 초 전라도의 전 지역을 순회하던 중 레이놀즈 목사는 순천에 들렀다. 이것이 순천에 개신교가 처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04년 광주에 선교기지가 개설되면서 광주에 있던 선교사 배유지(裴裕祉)[Eugene Bell, 1868~1925] 목사는 순천을 오원 의사의 선교구역으로 결정하였다. 오원 의사는 직접 전라남도 고흥군, 보성군, 광양시, 여수시 등지에서 순회 전도를 하였다. 1909년에는 변요한(邊要翰)[John Fairman Preston, 1875~1975] 목사와 배유지 목사가 순회 여행 중 순천에 들러보니 50여 명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미 순천에 기독교 교인들이 많았다. 회집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교회가 개척되고 성장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격리 때문에 보살필 수 없었으므로 순천 지역에 선교기지를 개설해 줄 것을 선교 본부에 요청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내 1910년 순천이 장래 이 지역 교통의 중심지가 되리라 판단하고 순천에 선교기지를 개설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변요한과 고라복(高羅福)[Coit Robert Thronwell, 1878~1932] 목사는 복음 선교, 팀몬스 목사와 그리이는 의료 선교, 구레인과 듀푸이는 학교 선교, 비거는 부인들의 전도를 맡도록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리고는 당시 매산등이라고 불리던 언덕배기에 선교사 마을을 만들었다. 체계적인 마스터플랜을 갖추고 만든 최초의 선교사 마을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서양식 건물들은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던 것에 반해, 이 건물들은 서양식 원형을 갖추고 있다.
순천에서는 1908년 예배 장소로 활용하던 순천향교 뒤쪽의 양사재를 일본군에게 빼앗긴 뒤 서문 밖의 초가를 빌려 활용하였다. 그리고 1910년 서문 밖 매곡동에 기지 400여 평과 초가 10여 평을 매수하여 20평짜리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 건물이 현 순천중앙교회의 전신이기도 한 순천읍교회이고, 순천시 최초의 교회이다.
이처럼 기독교 선교와 함께 교육과 의료 사업이 병행되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선교사 변요한과 고라복 목사는 1910년 4월 순천 금곡동 사숙에서 학생들을 모아 개교하였다. 다음 해인 1911년에 매곡동에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13년 9월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사립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순천매산고등학교이다.
순천 의료선교의 개척자는 팀몬스 의사와 그리이였다. 이들의 진료는 1913년 건축사업 감독을 위해 사무실용으로 만든 조그만 판잣집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6개월 동안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6~7자의 조그만 방에서 진찰과 수술, 간호까지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35개의 병상을 갖춘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설계와 시설을 갖춘 ‘안력산[알렉산더] 병원’이 개원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들은 지금도 상당수 남아 있고, 선교사 마을로 불린다. 선교사 마을은 의료원공원을 지나 중앙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앙교회에 이어 조지와츠기념관, 매산중학교 매산관, 매산여자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순천 구 선교사 프레스턴 가옥과 로저스 주택, 매산여자고등학교 뒤편 여수애양병원 재활직업보도소 내에 있는 순천코잇선교사가옥과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학교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모두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안력산 병원과 매산학교 석축 강당은 199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향동의 현재와 미래]
이렇듯 삼산이수의 중심 향동은 지금도 순천만의 문화, 유학과 기독교가 버무려진 상태로 강한 문화 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러나 삼산이수로 둘러싸인 좁은 형국은 오히려 향동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좁은 도로는 교통 체증과 주차공간 부족을 초래하였다. 여유 공간도 많지 않아 순천의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생활습관과 가치관이 바뀌면서 젊은 층은 공동주택을 선호하였다. 순천 생활 공간은 삼산이수의 품을 벗어나, 순천시 연향동, 조례동, 왕지동, 신대 지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수 너머에 사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향동의 삶과 사람은 줄어들었다. 향동이 품은 문화적 가치는 고사할 위기에 처하였다. 인적이 끊긴 향동의 상가는 문을 닫았고, 밤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순천시에서는 500년 숨결의 향동을 되살릴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순천시는 2008년 ‘문화의 거리 조성과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여 향동의 일정 구역을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고 그 안에서 지역 문화와 예술 종사자들이 작업공간을 마련하면 일정한 지원을 하고 있다. 문화의 거리에 걸맞도록 일반 상가의 간판을 교체하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2008년부터 순천기독교역사성지화 사업의 일환으로 메모리얼파크와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옛 읍성터에 들어선 주택을 매입하여 성터와 성문 일부를 복원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제 첫걸음이다. 성리학과 기독교, 전통과 근대 문화가 교차된 향동의 문화유산을 활용해 순천만의 빛깔을 내기 바란다. 예로부터 순천에는 많은 시사(詩社)가 있었다. 시흥에 겨우면 누구나 시를 지어내던 고을이었다. 판소리를 명창처럼 내지는 못해도, 귀만은 명창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붓을 잡으면 일필휘지 명필에, 난을 치면 이끼 낀 바위가 절로 생겨나는 이도 많다. 유화를 그리고 연극을 하는 이들도 많다. 이러한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부대끼다 보면, 뭔가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500년 문화 중심 향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특구로 성장할 날이 가까운 미래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