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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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공식명칭 | Buddhism |
영어의미역 | Buddhism |
영어공식명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수 |
[정의]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불교 전래와 발전.
[순천의 불교 전래]
호남의 불교 전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후대의 일인 것 같다. 대다수 사람은 백제시대에 호남의 남부에도 불교가 번성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문헌과 유물·유적으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백제 말기에 익산 미륵사 등이 조성되었으므로 전라북도 지역은 백제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전라남도 지역에는 통일신라 이후부터 불교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영암 불갑사에는 마라난타 창건 설화가 전하고, 해남 대흥사에는 6세기 아도화상(阿道和尙) 창건 설화 등이 전해오지만, 이는 지역 불교의 유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조작된 설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속고승전』 권28 「백제국달나산사석혜현전」과 『삼국유사』 권5 피은편 「혜현구정」의 내용을 통해 백제 말기에 전라남도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혜현[570~627])이 어려서 출가하여 기도하여 복을 빌면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처음에는 예산 수덕사에 살았는데 대중이 많아 찾아오자 번잡한 것을 싫어하여 강남의 달라산(達拏山)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강남의 달라산’이라고 한 곳을 지금의 영암 월출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백제 말기에 해당하는 7세기 초 영암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 이전에는 영암 지역을 제외한 전라남도 지역에 불교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리산의 경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불교 전래 시기는 8세기 이후이다. 구례의 화엄사와 산청의 단속사·석남사[지금의 내원사] 등이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8세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지리산 인근 전라남도 지역은 통일신라 이후에 불교가 정착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가까운 순천은 월출산이 있는 영암 지역에 불교가 먼저 정착했다고 본다면 차츰 동진하여 순천까지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삼국 통일 이후 진주 지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리산 일대에 8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볼 때 그보다 빠른 시기로 비정하기는 어렵다. 이런저런 시대 상황을 종합해볼 때 순천 지역에는 8세기 이후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그 보다 올라가는 불교 유적이나 문헌은 발견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 순천의 불교 전래]
순천 불교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體澄)[804~880]이 계족산 정혜사를 창건했다고 한 기록,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900]이 금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선암사와 향림사를 창건하고 도선암 아래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 기록 등이다. 그리고 송광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진 혜린선사(慧璘禪師) 역시 신라 말의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는 순천 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어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창건의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순천 최초의 사찰이 어디인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초기에 불교를 전래한 승려들이 대체로 선문(禪門)의 승려였던 것으로 볼 때 선종 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통일신라시대 불교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아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9세기 이후 선(禪)이 전래되어 지방을 중심으로 선문이 형성되고 있었다. 8세기 중반 지리산 화엄사가 창건되었으므로 알려지지 않은 화엄종의 사찰이 순천 지역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9세기 중반 순천 가까운 곳에서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이 형성되고 있었으므로, 이 세 산문의 승려들이 점차 순천으로 진출하면서 9세기 말경에 사찰을 창건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고려시대 순천 불교]
고려시대 순천 불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과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에 관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중앙 정치의 부침 속에서 약 2년간[1094~1096] 해인사에 은거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남도의 여러 사찰을 둘러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각국사 의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지리산 화엄사·조계산 선암사·개운산 동화사 등이다. 화엄사 각황전 주련에는 지금도 대각국사 의천의 시가 걸려있으며, 선암사에서는 중창주로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동화사 역시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 기록으로 볼 때 대각국사 의천이 남도에 은거했던 2년의 대부분은 해인사에 머물렀으므로 순천 지역은 남도를 순행할 때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대각국사 의천이 남도를 순행한 지 100년쯤 지난 1200년(신종 3)경에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 와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어갔다. 처음 정혜결사를 시작한 곳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였지만 장소가 협소하여 새로운 결사처를 찾다가 송광사에 이른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는 조정의 명에 의해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명칭이 바뀐 후에도 많은 수행자가 참여하였고,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에 이르러서는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고려 말까지 16국사를 배출할 정도로 융성하였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행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혜소국사(慧炤國師) 담진(曇眞)[11세기 후반~12세기 초]이 계족산 정혜사에서 산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수선사 제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3]가 정혜사에 머물며 사찰을 크게 중창한 바 있었다.
[조선시대 순천 불교]
조선 전기 순천 불교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찰은 향림사와 순천 송광사이다. 태종 대에 전국 88사(寺)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였는데, 그때 향림사가 화엄종 사찰로서 포함되었다. 그리고 세종 대에 선종과 교종 각각 36사(寺)를 선정할 때 순천 송광사가 선종 사찰로 등록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불교계는 자급자족하며 부처의 혜명[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이어갔다. 순천에서는 순천 송광사와 순천 선암사에서 많은 고승을 배출하며 한국 불교의 중심이 되어갔다. 순천 송광사는 정유재란으로 큰 피해를 봤는데,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부휴(浮休) 선수(善修)[1543~1615]가 40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와서 순천 송광사를 중창하였다. 이때 수백 칸의 건물이 중수되고 선원과 강원이 새로 개설되면서 부휴 문도의 종찰이 되었다. 조선 후기 불교계는 전국적으로 청허계[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의 문도]와 부휴계[부휴(浮休) 선수(善修)[1543~1615]의 문도]로 양분되었는데, 순천 송광사가 그 부휴계의 종찰로서 불서 간행과 강학 활동을 통해 계파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중반 왕실 원당으로 지정되었고,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순천 선암사는 1698년(숙종 24)~1707년(숙종 33)에 호암(護巖) 약휴(若休)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다. 현존하는 전각과 불상 등 대부분 이때 건립되거나 중수되었다. 약휴는 1707년 불사를 회향하면서 채팽윤[1669~1731]으로부터 「조계산선암사중수비」의 글을 받아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중창에 기반하여 1754년(영조 30) 상월(霜月) 새봉(璽封)[1687~1767]이 순천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열었을 때 1,282명이 모이기도 했다. 이로써 순천 선암사는 호남을 대표하는 강원으로 발전하였다. 선암사 강원은 북암[운수암]과 남암[대승암]이 경쟁하면서 발전하였다. 북암에서는 해붕(海鵬) 전령(展翎)[?~1826]을 비롯하여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의 강백들이 거처하며 조선 말기까지 강맥을 이었다. 그리고 남암은 침명(枕溟) 한성(翰醒)[1801~1876]이 1829년(순조 29)부터 선암사 대승암 강원에서 약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번창하였다. 침명 한성의 전강(傳講)제자는 함명(函溟) 태선(太先)이었고, 함명 태선은 1866년(고종 3) 가을에 경붕(景鵬) 익운(益運)[1836~1915]에게 강학을 전하였다. 또 경붕 익운은 경운(擎雲) 원기(元奇)[1852~1936]에게 강학을 전하고, 경운 원기는 금봉(錦峰) 병연(秉演)[1869~1915]에게 전하여 대승암의 강맥이 근세까지 이어짐으로써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4대 강맥으로 평가받았다.
[근현대 순천 불교]
근현대에 이르러 순천 불교는 순천 송광사와 순천 선암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제강점기 전국 30본산을 정할 때 순천 송광사와 순천 선암사가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유시를 발표한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쟁으로 인해 불교계가 양분되었다. 1962년 비구승과 대처승이 상호 존중의 원칙 속에 전통 불교의 재건을 위한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을 출범시키고, 서울 조계사에 총무원을 설치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해나갔다. 하지만 점차 비구승 중심의 운영으로 상호 대립 상태는 해소되지 못하였다. 결국, 1970년 1월 종무행정의 편파적 운영을 반대하는 승려들이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별도의 종단을 등록함으로써, 통합종단은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조계종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태고종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순천 송광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교구 본사가 되었고 순천 선암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이 되었다.
그런데 1970년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등록한 사찰 대부분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등록되었던 사찰이었기 때문에 재산권 분쟁이 발생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개별 사찰의 종단 이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불교태고종으로 이전한 사찰의 재산권이 대한불교조계종에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순천 선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한국불교태고종 사이의 분쟁에서 가장 첨예한 사찰이 되었다.
순천의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전통 사찰은 순천 송광사를 비롯하여 정혜사·동화사·흥륜사 등이 있고,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전통 사찰은 순천 선암사를 비롯하여 금둔사·향림사·도선암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에 새로 창건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등록의 사찰로는 대승사·금룡사·보승사·홍선사 등이 있다. 한국불교태고종 등록의 사찰로는 남흥사·불영사·고룡사·고승암·남해정토사·봉암사·용화사·천황사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대한불교조계종이나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들이 여러 곳에 건립되어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