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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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Koryo Dynasty |
영어의미역 | Koryo Dynasty |
영어공식명칭 | Kory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욱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 구역의 변화]
고려시대 순천의 행정구역은 변화를 거듭하였다. 후삼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일국가를 건설한 고려는 지방세력까지 통치체제로 포섭할 여력이 없었다. 태조부터 경종 대까지[936-981] 일부 군사적인 거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지방세력의 자치상태에 있었다. 조세 수취를 맡은 금유, 조장, 전운사 등이 지방에 파견되어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지방의 일부나마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983년(성종 2)이었다. 이때에는 승주를 포함한 12주에 목이 설치되었다. 최초의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에 순천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순천의 위상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목이 설치되었던 큰 주를 중심으로 12절도사를 두었다. 그 밑에 7도단련사(都團練使)·11단련사·21방어사·15자사(刺史)를 설치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을 겪은 이후 지방호족세력의 통제 강화와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서였다.
12주에는 절도사를 장관으로 하는 12군(軍)이 설치되었다. 순천에는 12주의 하나인 승주(昇州)가, 승주에는 12군의 하나인 연해군(兗海軍)을 두었다. 승주-연해군과 나주-진해군은 10도 중 해양도(海陽道)에 속했고, 승주연해군은 낙안, 곡성, 부유, 광양, 여수, 돌산 및 다수의 향·소·부곡을 관할하였다.
절도사체제는 1005년(목종 8)에 절도사만 남고 양계(兩界) 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단련사·단련사·자사 등이 없어짐으로써 아래서부터 붕괴되었다. 대신 점차적으로 지주부군(知州府郡)과 현령(縣令)으로 대치되다가 1012년(현종 3)에 12절도사마저 폐지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었고, 5도호(都護)와 75도안무사가 설치되었다. 이는 강조의 정변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과 거란의 2차 침략으로 인한 왕조와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려는 조치였다. 이때 조치로 순천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1018년(현종 9)에 다시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고, 이는 고려 말까지 그 골격이 유지되었다. 전국을 경기[개경]와 호경[서경] 및 12계수관도로 나누었다. 12계수관은 4도호부와 8목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위상이 낮은 부[지부사], 주[방어사·지주사]·군[지군사]을 두는 방식이었다. 순천은 지주사가 파견되는 승주가 되었다. 983년 이래 12목으로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동격이었던 순천은 한 단계 강등된 것이었다. 1036년(정종 2) 승주는 다시 한 단계 낮은 지군사가 배치는 승평군으로 개칭, 강격되었다. 관할 구역도 부유현, 광양현, 여수현, 돌산현 등이었지만, 곡성군과 낙안군 등은 나주목의 관할로 이관되었다.
이 시기 순천의 위상이 축소되었던 것은 순천 지역 호족세력의 위상 저하 때문이었다. 위상이 약해졌던 순천이 일시적으로 승격된 시기가 있었다. 1309년(충렬왕 34) 승평군이 일약 승주목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순천부로 개칭되었다. 그것은 1308년 왕위로 복위하게 된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관련이 있었다. 충선왕은 즉위와 함께 수취체계를 바로잡고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은닉되어 수세에서 빠진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형태로 행정체제를 개편하려고 하였다. 충선왕은 전국에 전민계점사(田民計點使)를 파견하여 인정과 호구가 많은 지역에 임시로 새로이 목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호구와 토지를 조사하는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 했다. 때문에 목으로의 승격 조치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업이 거의 마무리된 1310년(충선왕 2)에 목으로 승격되었던 군현들의 관격을 원래대로 환원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임시적인 조치로 끝나긴 했지만, 이때의 조치로 ‘순천’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했고, 관호도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토착 세력]
순천 지역의 토착 세력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순천부 조에는 “토성이 4개다. 장(張)·박(朴)·김(金)·강(康)이다. 망성(亡姓)은 하난데, 도(陶)이다. 내접성(來接性)도 하나니, 임(林)[풍산(豊山)]이요, 속성(續姓)도 하나로 이(李)[향리(鄕吏)]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순천 지역의 토성은 네 성씨임을 알 수 있다. 이 중 장씨와 강씨는 거의 자료에 등장하지 않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박영규(朴英規)를 ‘강영규’라고 하였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모두 ‘박영규’로 나오고 있다. 고려 건국 당시 순천을 대표하던 호족 세력이었던 박영규와 김총(金摠)은 통일 이후 중앙정부로 진출하기보다 지방세력으로 잔존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입지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순천박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박영규와 함께 몽골 침략기에 박난봉이 출현하고, 박난봉이 순천박씨의 중시조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으로 생각된다. 중앙이나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약해졌던 순천박씨가 박난봉의 출현으로 위상을 회복했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박난봉 이후 순천박씨는 순천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몽골 간섭기에는 중앙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전국적인 수준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고려시대 박영규 이후 사료상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인물은 박숙정이다.
순천김씨 역시 고려시대 내내 중앙 정계에서는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순천김씨가 위상을 회복한 것은 고려 말에 여수 출신의 김승주 때였다. 김승주는 여수 출신으로 고려 말에 무장으로 활약하다. 태종의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다. 1417년(태종 17) 평양부원군에 책봉되고 검교좌의정을 지냈다.
[대외 관계]
순천은 한 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3면이 내륙으로 연결되는 지형으로, 남해에 닿아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적합한 지역이다. 특히 섬진강을 따라 구례·남원으로 갈 수 있고, 섬진강에서 보성강으로 이어지는 순천 지역을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섬진강을 따라 침략해 오는 왜구가 순천을 약탈하기 쉬웠다. 이 때문에 지역별로 왜구의 침략 횟수를 보면 경상도가 140회로 가장 많고, 전라도는 50여 차례 침략을 받았다. 특히 우왕 대에 왜구의 침략이 집중되었는데, 이때 전라도에는 지역을 합산하면 45차례 정도 침입을 당하였다. 이 중 순천은 15차례의 침입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남수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려 말년에 정치는 잘못되고 나라는 위태로와 왜구 침입이 극렬하여 깊이 쳐들어와서 경기(京畿)에까지 이르니, 바다에 연한 수천 리 땅이 버려져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순천(順天)이 화를 가장 참혹하게 당해서 빈터만 남고 들에는 쑥대만 우거졌으니, 가위 한심한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는 섬진강을 타고 구례로 넘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구례에 석주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는 조치를 하였다. 그러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순천 지역의 왜구가 뜸해진 것은 이성계(李成桂)가 남원·운봉 일대에서 왜구를 격멸하고, 정지(鄭地)가 남해에서 왜구의 선박을 대파한 다음이었다.
[문화]
순천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수선사를 결성하고 활동했던 곳이었다. 지금의 순천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를 결성하고 만든 수선사가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 후기 순천은 고려불교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무신란 이후 무인집권자들은 문벌귀족 및 그들과 밀착된 교종불교 세력을 억압하여 거세한 다음, 자기 세력 기반으로 그동안 교종세력에 눌려 지방의 산중에서 명맥만을 유지해왔던 선종 세력에 눈을 돌렸다. 무인들이 산중에 전해오는 선종계 절을 구입하여 중흥시키는 것이 사회 일반의 분위기였다. 고려 후기가 되면 무신정권 밑에서 길러져서 다시 등장하는 문신들이 불교의 결사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수선사나 백련사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 속에서 결성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거조사에서 1190년(명종 20) ‘정혜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 정혜사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거조사는 너무 좁아 여러 사람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지눌은 문제(門弟)인 수우에게 적당한 곳을 찾게 하였고, 마침 송광산[조계산]에서 한 폐사를 찾아냈으니 그것이 곧 길상사(吉祥寺)였다. 지눌은 송광산으로 정혜사를 옮겨와 결성하였는데, 마침 그 이웃에 또 다른 정혜사가 있었다. 그래서 지눌은 정혜사를 ‘수선사’로 고쳤다.
고려 문벌 귀족 체계와 결탁된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앙결사였던 수선사는, 문벌귀족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서서히 성장해 온 지방사회의 향리층은 물론 이들과 이해가 일치하는 신흥독서층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수선사가 표방한 불교의 새로운 경향은 널리 지방에 소재한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받았다.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定)[Samādhi]과 혜(慧)[Prajnā]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었다. 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다. 돈오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제불(諸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며, 비록 돈오하여도 습기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려불교사에서 기본적 과제였던 선교통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
수선사의 성립은 선교 일치의 완성, 간화선의 선양이라는 불교 사상적인 의미와 실천 불교로서 임무를 완성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로써 수선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대 불교계 혁신 운동의 중심체였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사의 큰 흐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