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1
한자 士林
영어공식명칭 Sarim
영어의미역 Sarim
영어공식명칭 Sari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정의]

조선시대 순천의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유학자와 선비 세력에 대한 호칭.

[개설]

사림(士林)은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여기에서는 조선 건국 이래 유학을 표방하면서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재야 선비들을 지칭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순천의 토착 세력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향회 등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외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이주해오고, 조위(曺偉)김굉필(金宏弼) 등이 유배 오면서 새로운 학풍과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순천부사 이정(李楨)이 부임해 김굉필 현창 사업을 진행하였고, 이에 신흥사족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순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신흥사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전쟁 이후 순천 지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영장사목(營將事目)」 반포 이후 사족들이 향촌 운영에서 제외되는 분위기가 고조되자, 활동 중심을 향회에서 향교로 옮기며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족들의 노력으로 순천에서는 향교가 서원들보다 중심적인 위상을 견지하면서, 학문의 진흥과 함께 향촌 사회의 운영에 일정 정도 참여할 수 있었다.

[15~16세기 신흥 사족의 순천 이거]

조선 전기까지 순천에는 순천김씨, 순천박씨, 순천장씨 등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토호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 건국 이전 순천에 정착하고 있던 옥천조씨, 장흥임씨, 남원양씨, 청주한씨, 후에 해남으로 이거하는 선산류씨 등도 있었다. 이들은 1500년(연산군 6) 김굉필조위가 순천에 유배 오자 이들과 교류하였다. 김굉필을 사사한 이로는 선산류씨의 류계린[류희춘의 부친]과 류맹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조위는 순천 지역 사족과 진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교유하였는데, 그 회원은 심종유(沈從柳), 양우평(梁禹平), 한인수(韓獜壽)와 당시 향교 교관으로 재직중이던 장자강(張自綱)이었다. 앞의 3명은 모두 이전부터 순천에서 세거하던 집안의 사람으로, 후일 순천의 유력 가문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장자강이 유일하다. 그런데 장자강진솔회에 들어갔던 것은 순천 지역 사족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장자강은 당시 순천에 교수관으로 순천에 재직하는 관원 신분으로 조위와 교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굉필 등과 교유했던 인물 중 훗날 순천의 유력 가문과 관련된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후일 순천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문중의 대부분이 아직 순천으로 이거하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순천의 주요 사족이라고 하는 7성 8문 중 옥천조씨를 제외하면 모두 김굉필이 죽은 1504년(연산군 10) 이후에 이거하였다.

순천에 뒤늦게 입향했던 사족들이 향중(鄕中)[향원의 동아리]의 주요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한훤당 김굉필을 추모하는 사업부터였다. 그 계기는 1563년(명종 18) 이정의 순천부사 부임이었다. 이정은 순천부사로 부임하면서부터 김굉필의 행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임청대의 옛터를 찾았다. 이어 경현당을 수축하였다. 임청대의 북쪽 언덕진 곳에 돌을 포개어 계단을 축조한 다음, 그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리하여 주위에 담을 두른 뒤 건물에 ‘경현(景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김굉필을 추모하는 뜻에서 붙인 명호였다. 이듬해인 1564년에는 강학할 수 있는 재를 갖춘 옥천정사를 건립하였다. 옥천정사는 3년 후에 옥천서원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는 순천 지역 사족의 근거지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승평사은(昇平四隱)으로 불리는 배숙, 정소, 허엄, 정사익 등 새롭게 순천에 입향한 사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이를 통해 점차 순천 지역 향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성장에 따라 기존 세력들은 향권에서 소외되거나 이전보다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기존 세력들이 집단으로 반발한 것이 이른바 ‘향안파훼사건’이었다. 향안파훼사건은 박성춘 등 대체로 오래전부터 순천 지역의 유력 사족층과 허희인 등 새로 이거한 사족간 충돌이었다. 신입 사족이 향안 작성의 주도권을 쥐었고, 기존 사족들이 그에 반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여파로 임대영 등은 3년 동안 향안에서 삭적(削籍)되었다. 이를 보면 16세기 중반 이후 새롭게 순천으로 입향한 사족들에게 순천 지역 향권이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과 신흥 사족의 정착]

순천 지역으로 이거한 신흥사족이 향권을 장악해가던 시점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그러한 과정을 더욱 촉진하였다. 신흥 사족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앞서 언급했던 장자강의 손자인 장윤(張潤)은 순천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의 부장으로 성주와 고령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진주목사로서 전쟁을 실제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장윤옥천서원과 함께 순천의 유일한 사액서원인 정충사에 배향되었다. 양천허씨허일허일의 아들, 그리고 종형제들도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순신 휘하에서 첩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경주정씨에서도 정빈, 정사준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광산이씨 역시 이기남과 그 종형제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 때 활약한 신흥사족의 후손들은 1605년(선조 38)부터 작성된 순천향안의 중심을 이루었다. 즉 임진왜란 이후부터 순천향안의 작성 주역은 기존 토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이거한 사족들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흥사족에 의한 향회가 구성되면서, 그 이후에 들어온 사족은 향회에 바로 흡수되었다. 제주양씨가 그 좋은 사례이다. 제주양씨의 입향조인 양신용(梁信容)은 17세기 초에 순천에 들어왔는데 1643년(인조 21)에 이미 향안에 양신용의 이름이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상호 혼인관계를 통해 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혼인을 통해 사족 간에 인척이나 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

[18세기 향집강 체제로의 전환]

신흥사족이 주도권을 장악한 향안체제는 얼마 가지 못하고 향집강체제로 전환되었다. 향안이 향청의 임원 명단이라면, 향집강안은 향교의 임원이었다. 이는 순천 지역 사족의 구심점이 향안에서 향교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1643년까지 순천향안의 임원은 좌수와 별감이었다. 그런데 1669년(현종 10)에는 향노(鄕老)와 향유사(鄕有司)로 바뀌었다. 그것은 이 사이에 순천에서 향소의 위상이 격하되었고, 사족들이 지방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향임을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계기는 1654년(효종 4)에 제정된 「영장사목」 때문이었다. 「영장사목」에서는 향임의 용모파기를 기록하게 할 뿐 아니라, 향임이 잘못을 저지르면 장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족으로서는 향임이 되는 것이 매우 굴욕적인 상황이 도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족들은 향임이 아니면서도 지역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조직을 향청이 아닌 지역의 원로라는 개념을 가진 향노라고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32년(영조 8)부터는 향집강안이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지역 향권의 중심이 향청에서 향교로 옮겨진 것을 의미하였다. 이후 순천의 사족들은 향교를 중수하고 양사재를 건립하여, 교육 및 향사 기능을 지닌 향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른 지역의 양사재의 설립과 운영은 중앙정부의 간섭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순천에서는 지역 사족들이 주도하여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18세기 이후 양사재의 출현을 재지사족의 영향력 위축과 수령권의 상대적 강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순천에서는 양사재 건립을 통해 재지 사족의 위상이 더 강화되었으며 이를 보조한 수령의 권한도 함께 강화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향교의 권한을 강화한 이후에는 사족 간 경쟁이 이루어졌다. 각자의 친족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각 문중의 조상을 배향하는 서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들은 향교를 능가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하였다. 모든 서원의 구심점이면서 상위의 개념으로 향교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천 지역 사족은 문중 서원을 통한 외부 지역 유림과 인적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오히려 내부에서 그들끼리의 교류가 확대되는, 그래서 인적 교류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순천에서 통용되는 “순천향교의 재임과 장의가 조그만 고을 수령보다 낫다.”라는 말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24 본관 오류 내용 삭제(숨김) 순천박씨도 박대붕과 같은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박대붕은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박대붕은 순천 박씨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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