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30
한자 知訥
영어공식명칭 Ji Nul
영어음역 Ji Nul
영어공식명칭 Ji Nul
이칭/별칭 목우자(牧牛子),불일보조(佛日普照)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58년연표보기 - 지눌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165년 - 지눌 종휘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 받음
활동 시기/일시 1188년 - 지눌 정혜결사 시작
몰년 시기/일시 1210년연표보기 - 지눌 사망
출생지 지눌 출생지 - 황해도 서흥군
활동지 순천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지도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후기 정혜결사를 개설한 순천 송광사에서 국사를 지낸 승려.

[활동 사항]

지눌(知訥)[1158~1210]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1대 국사이다.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지방 향리층 정광우(鄭光遇)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호는 목우자(牧牛子)이고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지눌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부모가 부처님께 출가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8세가 되던 1165년(의종 19)에 부모의 허락을 받고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문(闍堀山門)의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스스로 소를 기르는 목동이라는 의미의 ‘목우자’라고 불렀다. 이는 선가(禪家)의 심우도(尋牛圖)[불교의 선종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가는 데 비유한 그림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지눌은 1182년(명종 12) 개경 보제선사(普濟禪寺)에서 개최된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동학 10여 명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치러진 선불장(選佛場)에서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뉘면서 그 맹세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때 지눌은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대덕(大德)이 되었으나 얼마 후 승직(僧職)을 버리고 홀로 남쪽으로 수행의 길을 떠났다.

지눌은 현 전라남도 담양 지역에 있었던 청원사(淸源寺)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진여자성은 생각을 일으켜 육근으로 비록 보고 듣고 지각하여 알지만, 만물에 물들지 않아서 진실한 성품은 항상 자재하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첫 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1185년(명종 15) 현 경상북도 예천군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화엄경(華嚴經)』의 “한 티끌 가운데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라는 구절과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몸 안에 다 갖추고 있지만,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라는 구절에서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읽으며 더욱더 깨달음의 경지를 깊이 맛보았다. 이때 알고 지내던 득재(得才)라는 선객(禪客)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와서 머물기를 간청하였다.

그래서 1188년(명종 18) 도반 4~5명과 함께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190년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유교와 불교,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고 결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1198년(신종 1) 봄에 선객 몇 명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거처를 옮겨 바깥 인연을 끊고 오로지 수행하였다. 이때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의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攀緣)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말고 참구(參究)해야 홀연히 눈이 열려서 비로소 그 모든 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세 번째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1200년(신종 3) 순천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의 명칭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그곳에서 정혜결사를 재조직하였다. 1204년(희종 원년) 희종(熙宗)이 즉위하여 결사의 명칭을 ‘정혜(定慧)’에서 ‘수선(修禪)’으로 바꾸도록 명하고,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벌과 함께 ‘수선사(修禪社)’라고 쓴 어필을 하사하였다. 인근 계족산(鷄足山)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로부터 ‘정혜사’가 아니라 ‘수선사’로 바뀌었지만 ‘정혜’가 곧 ‘수선’의 의미와 같았기 때문에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의미는 차이가 없었다.

지눌은 1210년(희종 6) 3월 27일 새벽 설법전에 대중을 모아 설법하시고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세수 53세 법랍 36세였다.

[사상과 저술]

지눌의 저술로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수심결(修心訣)』,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지눌이 입적한 후 희종은 국사로 추증하고 불일보조(佛日普照)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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