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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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英規傳說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Park Yeong-gyu(Folktale) |
영어음역 | The Legend of Park Yeong-gyu(Folktale) |
영어공식명칭 | The Legend of Park Yeong-gyu(Folkta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해숙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박영규전설」 『강남악부』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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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해룡산 - 전라남도 순천시 오천동 |
채록지 | 「박영규전설」 - 전라남도 순천시 |
성격 | 인물담|신이담 |
주요 등장 인물 | 박영규|견훤 |
모티프 유형 | 인물의 신격화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견훤을 도와 후백제를 건국한 박영규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박영규전설」의 주인공 박영규(朴英規)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전라도 순천대도호부 인물조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강남악부(江南樂府)』에는 의 기록을 인용한 내용이 간략히 실려 있다.
[내용]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박영규는 후백제의 임금 견훤(甄萱)의 사위이다.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자 견훤은 도망해서 금성(錦城)으로 달아나니, 태조 왕건(王建)은 견훤을 맞아 높여서 상보(尙父)로 삼았다. 이에 박영규는 가만히 아내에게 말하기를, “열녀는 두 남편을 다시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라.” 하고, 드디어 사람을 보내 태조 왕건에게 고하기를, “왕께서 만일 의기(義旗)를 드시면, 청하건대 내응(內應)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 왕건이 크게 기뻐하여 박영규가 보낸 사자에게 후히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뒤에 신검을 베자 태조 왕건은 박영규에게 이르기를, “임금이 이미 나라를 잃었는데 경의 내외가 홀로 그 아비에게 정성을 다하고 겸하여 아름다운 공을 내게로 돌려보냈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도다.” 하고, 인하여 좌승(左丞) 벼슬을 주고 박영규의 두 아들도 벼슬을 시켰다. 박영규는 죽어서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었다.
『강남악부』에는 『평양구지(平陽舊誌)』[옛날 순천읍지]를 인용하여 박영규는 강남군(江南君)[박언지(朴彦智)]의 후손이다. 견훤의 사위였고 이 땅의 군장이었다. 해룡산 아래 홍안동에 웅거하고 있었다. 나중에 고려에 투항하여 좌승의 벼슬을 얻었다. 죽어서 해룡산 산신이 되었고,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모티프 분석]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견훤의 강력한 지원세력으로 935년(태조 18) 3월 신검이 반역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6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에 망명하자, 936년 9월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내응[내부에서 몰래 적과 통함]하여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박영규뿐만 아니라 김총도 견훤에게 벼슬을 하였는데, 이로 보아 순천 지역의 호족 세력들이 한때 후백제의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순천에는 견훤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홍내동[현 순천시 오천동] 해룡산에 토성이 있는데 전설에서는 이 산성을 견훤이 쌓았다고 한다. 비록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지만 이러한 전설이 전하는 것은 견훤과 순천의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강남악부』에 박영규가 홍안동에 웅거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지금 홍내동에 있는 견훤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김총을 성황신으로 모시듯이 박영규 역시 죽어서 해룡산신으로 모신 점은 순천 일대를 지배하는 세력가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