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70 |
---|---|
한자 | 堤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 설치되었던 관개 시설(灌漑 施設).
[개설]
제언(堤堰)은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강이나 계곡에 구조물을 쌓아올려 물을 저장하는 관개 시설로, 언제(堰堤) 또는 제방(堤防)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농경 국가였던 조선에서 관개 시설의 확충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관개 시설에 대한 기사가 자주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제언에 관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국가적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의성군 행정 구역은 조선 시대의 의성현(義城縣), 비안현(比安縣)을 비롯하여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인 단밀현(丹密縣), 보주(甫州)[예천(醴泉)]의 속현인 다인현(多仁縣), 용궁현(龍宮縣)의 일부분[현 안사면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에는 예전부터 다수의 제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의성현의 제언]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 산천 항목을 보면 “탄지(炭池) 현 남쪽 3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의성현에 설치된 제언에 관한 기록으로는 이것이 최초이다. 탄지는 조선 전기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부터 조선 후기의 자료인 『여지도서』·『경상도읍지』·『의성현지』·『교남지』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 설치 연원이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운용되었던 제언이라 할 수 있다. 탄지란 이름에 대한 유래는 19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성현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의성현지』에는 “누가 묻기를 못을 숯[탄(炭)]이라 이름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민성(李民宬)이 말하기를 ‘여기서 빙산(氷山)으로 가는 몇 마장 되는 곳에 옛사람이 빙탄(氷炭)을 상제(相制)하는 것을 만들어 덮어 두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산에 얼음이 있어 항상 못에 파급되고, 숯을 만들어 물·불의 재앙을 구제토록 빌어 음양을 조화시켜 길이 재앙이 없고 우리 향리에 이롭게 한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조선 시대 의성현에 설치된 제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여지도서』를 보면 현의 동쪽에 18곳, 현의 북쪽에 11곳, 현의 서쪽에 18곳, 현의 남쪽에 44곳, 총 91곳에 제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여지도서』에 제언 항목이 있는 군현 중 5번째로 많은 수이다. 『경상도읍지』에는 기존에 설치되었던 27곳에 더해 신설된 청옥동제(靑玉洞堤)와 가도곡제(佳道谷堤) 등 2곳, 총 29곳의 제언을 기록하고 있다. 『의성현지』에는 기존에 설치되었던 20곳과 신설된 구눌제(求訥堤)·금석제(金石堤)·석곡제(石谷堤)·외동제(外洞堤)·적현제(赤峴堤)·조겁지제(鳥迲只堤)[조주지제(鳥走只堤)의 오자로 보인다] 등 6곳, 총 26곳의 제언을 기록하고 있다. 『교남지』에는 기존에 설치되었던 15곳과 신설된 답촌제(畓村堤)·도동제(都洞堤))·보통제(普通堤) 등 3곳, 총 18곳의 제언을 기록하고 있다.
[비안현의 제언]
비안현에 설치된 제언의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비안현 산천 항목의 “저지(猪池) 안정현(安貞縣) 서쪽에 있다. 개천지(開天池) 현의 북쪽 21리에 있는데 현감 이간(李玕)이 쌓았다.”는 것이 최초의 것이다. 자료의 소략으로 현감 이간이 부임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중종 이전에 부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개천지의 경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황폐해져 사용되지 못하다가 1913년 강기덕(康基德) 등에 의해 중건되었는데, 이를 기리는 공적비가 현재의 개천 저수지 옆에 남아 있다.
『여지도서』에는 현의 동쪽에 5곳, 북쪽에 10곳, 서쪽에 12곳, 총 27곳에 제언이 축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읍지』에는 기존 27곳의 제언 중 현서에 위치한 한동제(閑冬堤)를 제외한 26곳과 신설된 고파(古破)·내병산(內屛山)·도암(都岩)·등매곡(騰每谷)·모고리(慕古里)·모로동(毛老洞)·성동(成洞)·송곡(松谷)[현서의 송곡인지 현북의 송곡인지는 알 수 없음]·신곡(薪谷)·신외병산(新外屛山)·옥포(玉包)·음연(陰淵)·지초(芝草)·천천(泉川)·한곡(閑谷)[신동면]·한곡(閑谷)[정서면] 등 16곳을 더하여 총 42곳의 제언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교남지』에는 26곳의 제언만이 기록되어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단밀현의 제언]
상주목의 속현으로 존속하였던 단밀현에 위치한 제언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주목 산천 항목 “대제지(大堤池) 단밀현(丹密縣) 북쪽에 있으며 주에서 68리다.”라는 기술이 최초이다. 『의성 군지』 등에서는 대제지를 일명 미기지(彌基池)[미끼못]라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도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며, 시축은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등과 마찬가지로 삼한 시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대제지 혹은 미기지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는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을 의성의 속현(屬縣)인 단밀로 비정하여 여기에 있는 저수지의 우리말인 ‘물뚝’·‘물동’을 한자로 미동(彌凍)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잘못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삼한 시대 시축설은 주읍인 상주의 공검지나, 이 지역의 지리적 특징인 제언의 높은 분포도, 또 여러 가지 전설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일정한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차후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단동에 4곳, 단밀현 북쪽에 1곳, 단남에 5곳, 총 10곳의 제언이 기록되어 있고, 『단밀현지』에는 9곳, 『상산지』에는 11곳, 『교남지』에는 10곳으로 비슷한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조선 시대 전 기간 큰 축조 사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다인현의 제언]
예천군의 속현으로 존속하였던 다인현에 위치한 제언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천현 산천 항목 “홍련지(紅蓮池) 다인현에 있다. 군의 동쪽 60리의 거리에 있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이후 『여지도서』에서는 군의 남쪽에 축조되었던 11개의 제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읍지』에서는 4곳의 제언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교남지』에는 『여지도서』에 기재된 제언 중 산립제(山立堤)를 제외하고 모두 기록하고 있으므로 『여지도서』에 기록된 제언들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용궁현의 제언]
『경상도읍지』에 수록된 「용궁현읍지」 제언 항목을 보면 용궁현 지역에는 모소제(毛沼堤)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자료의 오기(誤記), 혹은 명확하지 않은 서술 등으로 인해 중복되는 것도 있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의성 지역에는 과거 많은 수의 제언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의성 지역에 제언이 많이 축조된 이유는 아마도 자연 환경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성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낀 소쿠리 모양의 분지로, 동서는 52㎞로 길고, 남북은 33㎞로 좁으며, 동서의 중간 지역은 잘록하여 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다. 면적의 절반은 평야이고 절반은 산이 차지하는데, 안계평야처럼 도내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도 있지만, 대개는 임야가 많고 평지는 협소하다. 의성군 경내를 흐르는 하천은 모두 낙동강 수계(水系)에 속하는데, 발원지가 대부분 군내에 있기 때문에 하천의 길이가 짧고 유량도 풍부하지 못하다. 강수량에 있어서도 전국 연평균 강수량인 1,200~1,300㎜에 미치지 못하는 961.5㎜로 한건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의성 지역의 자연환경은 조선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의성 지역 주민들이 평지의 대부분을 농경지로 활용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나, 경작에 필요한 물을 충당하기엔 의성의 자연 조건이 열악하였다. 그 결과 제언을 축조하여 농경에 필요한 물을 충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평지보다는 태백산맥과 소맥산맥에서 뻗어 나온 계곡을 활용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제언을 축조하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