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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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陽里山城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산77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신종환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7년 - 봉양리 산성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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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봉양리 산성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시 지표 조사 실시 |
소재지 | 봉양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산77 일원 |
성격 | 산성|석축 산성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에 있는 산성 유적.
[개설]
봉양리 산성터 유적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하고개 마을 동쪽에 있는 높이 229.5m의 대암산과 그 북쪽으로 연결된 높이 207m의 봉우리를 감싸며 남북으로 길게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암산을 봉성산 혹은 봉화산이라고도 부르며, 산성을 동서로 관통하는 고갯길을 봉우재 또는 봉화재라 부른다.
산성 내에는 성벽을 따라가며 망루지 등의 건물지가 확인되며, 지형이 가장 낮은 곳인 봉우재 고갯길 양쪽은 동문지와 서문지로 추정된다. 산성의 둘레는 2.5㎞ 정도이며 잔존하는 성벽은 높이 1m, 폭 2m 정도이다. 한편 동쪽의 최고봉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높이 221.8m의 봉우리에는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유적이 있다.
[변천]
봉양리 산성터 유적에 대한 변천 과정은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864년경에 김정호(金正浩)에 의해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비안현조에서, 비안현의 성지(城池) 항목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기사가 있다. “고성(古城)이 비안현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성황산이라 칭한다[古城 北一里 称城隍山]” 라는 기록이다. 어쩌면 봉양리 산성터를 비안현의 고성으로 파악한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한편 1998년 발행된 『의성 군지』에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2차 침입과 관련하여 축성했다거나, 공민왕과 관련된 일화,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게 함락되었다는 등의 기사가 있으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산성의 입지적 특징과 축조 형태 등에서 삼국 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위치]
봉양리 산성터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봉양리 산77·산81·산82·산86-1·산86-2 일원에 위치한다. 안계 평야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개천 저수지의 동쪽에 위치한 대암산 정상부에 해당한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예로부터 서쪽의 하고개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골짜기를 따라가면 되는데, 이 길은 봉양리에서 안정리로 넘어가는 고갯길로서 지금도 오솔길이 있다. 그리고 산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봉양 1리 석정 마을에서도 올라갈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7년 5월~11월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지표 조사가 있었고, 2004년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서 『의성군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98년 4월~5월 사이에는 의성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에서 의성 관내 봉수 유적에 대한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를 하였으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봉양리 산성터 유적이 위치한 일대는 안계 평야의 동쪽에 위치한 낮은 산지로서, 군데군데 민묘가 조성되어 있을 뿐 대부분 수목이 우거져 있는 상태이다. 산성의 북쪽과 남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나머지 구간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나 대부분 허물어져 돌무더기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 정상의 서쪽 끝에는 망루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성 내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갯길의 입구와 출구는 모두 성의 동문지와 서문지로 추정된다. 한편 동쪽의 최고봉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높이 221.8m의 봉우리에는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유적이 있다.
[의의와 평가]
봉양리 산성터 유적에 대한 문헌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유적에 대한 의의를 밝히기 어렵다. 다만 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비안현조에 나타나는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유적이 봉양리 산성터 안에 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해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의 비안현조에서 “성지(城池)도 없고 봉수(烽燧)도 없다”고 한 기사도, 이 산성의 폐지 시기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아무튼 봉양리 산성터 유적은 적어도 1760년 무렵까지는 성내에 있는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유적과 함께 기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봉양리 산성터 유적은 안계 지역의 고대 정치 집단과 관련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이며, 지역의 행정의 중심이었던 비안현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