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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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영어의미역 | Traditional Road Syste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현용 |
[정의]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역과 원.
[개설]
서울에 있는 중앙관서에서 지방 시찰 또는 지방에서 중앙과의 행정 연락을 위한 교통 통신과 그 밖에 기찰사무(譏察事務)를 관장하는 지방분장소에는 역(驛)이 있었다. 이러한 역원제도는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려 초 1079년(성종 2) 6월 역의 대소에 따라 역전(驛田)을 지급하고, 1379년(우왕 5)에는 국가 차원에서 이를 더욱 체계화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고 재정비하여 전국적으로 간선과 지선을 정하고 대·중·소로 등급을 정하여 역을 설치하였는데, 전국적으로 540여 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역에는 역원(驛員)을 배치하였는데, 1508년(중종 3)에는 역의 책임자를 별감(別監)에서 찰방(察訪)으로 개칭하여 종6품으로 봉하였고, 1627년(인조 5)에는 찰방을 정6품으로 승진시켜 더욱 조직을 강화하였다. 그 후 1899년에 찰방제도를 폐지하였다.
역은 군사적 의미가 매우 크고 관에서 설치·운영하여 교통을 지원하는 행정기관의 역할을 한 반면, 원(院)은 민간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로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역제도는 봉수제도와 병행하여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는데, 봉수제도는 불과 연기로 긴급 사항을 중앙 정부에 알리는 수단인 반면에, 역원제도는 중앙과 지방간의 공문서 전달 기능을 담당하였다.
중앙 정부의 관리가 말을 타고 지방으로 공문서를 전달하는데 말이 지치면 다음 역에서 다른 말로 갈아타게 되며, 역에서는 여기에 필요한 말들을 항상 확보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역의 운용을 위하여 9대 간선로를 정하였는데, 강원도는 중로(中路), 경상도는 대로(大路)에 속하였으며, 울진은 당시 강원도였으므로 중로에 속하고 평릉도(平陵道) 노선에 위치하고 있다.
원은 역과 역 사이에 설치된 간이역과도 같은 기능을 하였으며, 출장 나온 관원들의 숙박 시설로 이용하였다. 민간 주도형으로 운영하다 보니 운영비 충당에 어려움이 많아 일반인들의 숙박에 이용되기도 하는 등 변칙 운영 사례가 늘어났고, 조선 중기 이후 차차 기능이 쇠퇴되어 대부분 주점·주막 등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시대 오랫동안 국가의 중요 시설로 공헌해 오던 역원제도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파발제(擺撥制)라는 새로운 통신 방법이 도입되어 봉수제도와 함께 차츰 쇠퇴하게 되었고, 갑오개혁의 전환기를 맞아 1887년(고종 24) 근대적 통신제도인 우사(郵舍)가 각 역을 중심으로 신설되어 역원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옛 교통로]
문헌에 의하면 울진 지역에는 4개소의 역[울진 3, 평해 1]과 7개소의 원[울진 4, 평해 3]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북쪽으로는 삼척의 옥원역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영덕의 병곡역과 연결되었다. 울진 지역의 역간 거리는 먼 곳은 수산역과 소조역으로 60리이며, 짧은 곳은 망양원과 덕신역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울진 지역의 옛 교통로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에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북쪽·서쪽·남쪽 등 크게 세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실려 있는 울진현과 평해군의 도로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문(官門)으로부터 동쪽으로 현내진까지 5리이고, 큰 바다[大海]에 이른다. 관문 서쪽으로 두천원까지 30리이고, 두천원으로부터 소조원까지 40리이다. 소조원으로부터 안동부 경계에 있는 광비원까지 30리이다. 광비원으로부터 길은 경상도에서 충청도에 이른다. 관문으로부터 남쪽으로 수산역까지 7리이고, 수산역으로부터 덕신역까지 30리이다. 덕신역으로부터 평해군 경계 남쪽으로 망양정까지 10리이다. 망양정으로부터 평해군까지 40리 길이고, 경상도로 향한다. 관문으로부터 북쪽은 흥부역에 이르는데, 40리이다. 흥부역으로부터 삼척부 갈령까지 10리이고, 갈령 북쪽으로부터 삼척부 100리 길을 넘어 함경도를 향한다. [『여지도서』 강릉진관 소속 울진현 도로조]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저장해진까지 10리이고, 관문 서쪽으로 선미까지 30리이고, 선미로부터 주령 신촌 영양현 경계까지 2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남쪽으로 관곡리까지 5리이고, 관곡리로부터 율현리까지 5리이다. 율현리로부터 지경리 경상도 영해부 경계까지 10리이다. 관문으로부터 북쪽은 화구리까지 7리이다. 화구리로부터 어현리까지 13리이고, 어현리로부터 정명리까지 5리이다. 정명리로부터 사동리까지 10리이고, 사동리로부터 망양정 울진현 경계까지 10리이다. [『여지도서』 강릉진관 소속 평해군 도로조]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삼척의 매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의 오른쪽으로 형성된 남북 방향의 도로[평릉도]와 북면 흥부에서 출발하여 십이령을 넘어 봉화·영주로 향하는 길과 주령을 넘어 영양으로 향하는 동서 방향의 도로가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원의 분포]
울진 지역은 남~북과 동~서로 형성된 도로를 중심으로 역과 원이 조선 전기부터 만들어져 운영되었으며,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역의 연결망은 모두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원의 연결망은 남~북과 동~서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서는 북쪽의 십이령을 지나는 도로와 남쪽의 주령을 넘는 도로에 연해 있다. 이는 서로 태백산맥을 쉽게 넘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역에는 중마(中馬)·복마(卜馬)·역리(驛吏)·졸노비(卒奴婢)를 두었는데, 찰방(察訪)이 있어서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마(驛馬)·역둔사(驛屯士) 등을 총 감독하며, 특히 암행어사의 출두 시에는 전 기동력과 권능을 발휘하고 어사에게 감찰 자료를 제공하며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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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울진·평해의 역과 원
[18세기 역의 현황]
『여지도서』에 역에 대해서 간략히 그 현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수산역은 중등마 2필·복마 8필·역리 31명·노 4구·비 5구이며, 덕신역은 중등마 2필·복마 2필·역리 27명·노 10구·비 4구이며, 흥부역은 중등마 2필·복마 7필·역리 48명·노 10구·비 1구이다. 평해의 신립역[달효역]은 대마 1필·기마 2필·복마 8필·노 122구·비 48구이다.
2005년에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리에서 다시원지로 추정되는 원 터가 발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초창은 고려 후기이고 여말선초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호원적원(戶元迪院)’이라 적힌 와편이 출토되어 다시원 이전 고려시대에는 호원적원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