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52 |
---|---|
한자 | 月松里胎室址 |
영어의미역 | Placenta Chamber Site in Wolsong-ri |
이칭/별칭 | 화구태실(花邱胎室),화구태봉(花邱胎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산15-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현용 |
성격 | 태실 터 |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산15-1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태실 터.
[개설]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胎)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즉, 태(胎)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라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고 묻었다.
태실은 아기태실[阿只胎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구분되는데, 아기태실은 최초로 설치한 태실을 말한다. 아기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아기태실에 추가로 지상 가운데에 부도(浮屠)와 비슷한 석물을 치장한 후 팔각난간석(八角欄干石)을 돌리고 그 옆에 귀부가 있는 화려한 태실비를 세운 후에 가봉을 하는데 이것을 가봉태실이라 한다.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시작된 시기는 문헌 기록상으로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부터로 확인된다. 이로 보아 늦어도 신라시대부터는 태를 봉안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 장태(藏胎)의 풍속은 『고려사(高麗史)』, 『죽계별곡(竹溪別曲)』등 고려시대 문헌 기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의 태실 제도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 장태 의식은 중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 고유의 풍속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태를 땅에 묻는 풍속이 있는데, 당(唐)나라부터 확인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태 풍속은 김유신의 태실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앞선다. 또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경지설(胎經之說)은 신라와 고려조간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 옛날 제도가 아니다.”라고 명시하여, 우리나라의 장태 제도가 고유의 풍속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태실은 거의 조선시대 왕실의 태실로 대부분 한강 이남 지역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성종 이후부터는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태실의 조성이 있었고 예외적으로 황해도 지역에도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봉(胎峰)의 조건은 무덤을 선정하는데 있어서의 명당 조건과는 달리 들판[野中]의 둥근 봉우리[圓峰]을 택해서 산 정상에 내맥(來脈)이 없고 용과 호랑이[龍虎]를 마주 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국속(國俗)으로 되어 있었다. 태실이 조성되는 태봉은 명당 조건에 따라 3등분으로 구분되는데, 1등급에는 왕의 태실, 2등급에는 대군과 공주의 태실, 3등급에는 왕자와 옹주의 태실로 나누었으며, 금표 구역 역시 태실을 중심으로 왕은 300보[540m], 대군과 공주는 200보[360m], 왕자와 옹주는 100보[180m]로 규정하였다.
[위치]
월송리 태실지가 있는 곳은 화구(花邱)로 불리는 월송3리 마을이다. 평해읍 평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3.4㎞를 가면, 국도 7호선 우측으로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이 있고 좌측으로 월송3리 표석이 나온다. 월송3리 마을 뒤쪽의 주산은 해발 131m의 일출봉으로서 월송리 태실지는 일출봉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돌출되어 솟아오른 해발 50.2m의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울진 국도 7호선 4차로 확장공사 때문에 부산국토관리청에서 안동대학교박물관에 조사를 의뢰해 2005년 11월 2일부터 2006년 2월 14일까지 시굴 조사가 시행되었다. 시굴 조사 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공사 과정 중에 태함이 발견되어 2차 발굴 조사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미 공사 때문에 유구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으며, 태함도 원위치를 이탈한 상태였다.
유구의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그 가운데에 태함을 둔 흔적이 확인되었다. 태함은 기석[몸돌]과 개석[뚜껑돌]으로 분리되었다. 개석은 반구형으로 크기는 지름이 111㎝에 높이가 57㎝이며, 기석은 원통형으로 지름이 112㎝에 높이 89㎝였다. 그리고 기석의 내부에는 큰 원통형 홈을 파고 그 바닥에는 작은 홈을 뚫었다. 또 기석과 개석을 접합한 석회가 일부 부착되어 있었다.
월송리 태실의 시기를 안동대학교박물관 측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양식의 월송리 태실의 태함은 조선시대 1462년(세조 8)의 월산대군 태함 이후부터 1581년(선조 14)의 광해군 태함 이전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현재 확인되는 월송리 태실의 태함 양식으로 보아 1476년(성종 7)의 성종의 딸 태함부터 1528년(중종 23)의 덕양군 태함 사이로 추정된다.
[현황]
월송리 태실지의 봉우리의 형태는 삿갓을 엎어 놓은 듯한 형상이며, 사방의 비탈면은 45도에 가까운 경사를 이루고 있다. 월송리 태실지 태봉산은 일출봉을 주산으로 하여 태봉산의 주위로 좌우에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산을 감싸 안 듯 돌려져 있다. 또 서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외방산거랑이라는 세천이 태봉산의 북쪽으로 돌아서 황보천(黃堡川)에 합류하여 동해안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으며, 그 주변은 논으로 형성된 평야이다.
동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외방산거랑을 건너 좌청룡을 형성하는 산에는 절골이라 하여 절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월송리 태실지가 자리한 곳으로 추정되는 산봉우리의 정상부는 지름 11m 정도의 비교적 널찍한 원형의 평탄지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월송리 태실지는 울진 지역에서 정식 발굴 조사된 태실로, 태실의 구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다. 발굴 조사 이전에는 신라시대 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의해 신라시대의 태실일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태함의 양식이 조선시대의 태실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