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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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暢幽契 |
영어의미역 | Changyu Mutual-Aid Socie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 단체.
[개설]
창유계는 일제강점기 후반 울진적색농민조합이 해체된 이후 이 조합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최학소, 전원강(田元江), 남왈기(南曰紀), 남원수(南源壽) 등이 이전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을 계승하고자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1939년 조직했던 계 조직 형태의 비밀결사이다.
[설립목적]
계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과 더불어 일제의 패망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에 일조할 수 있는 자금을 적립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변천]
농민조합운동의 주축이었던 남원수, 전원강, 최학소 등은 1938년에 들면서 새로운 조직체를 건설하기 위해 동지를 포섭·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원수는 임시헌(林時憲), 남용선(南容善), 주진욱(朱鎭煜), 남정규(南精奎) 등을, 남원수와 전원강은 노하순(盧夏淳), 최효대(崔孝大) 등을, 전원강은 최연덕(崔淵悳)을, 최학소는 주영석(朱永錫)을, 장세전(張世銓)은 남용식(南龍湜) 등을 각각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2월경 남원수, 남왈기, 장세전, 노하순, 최효대, 주진욱 등이 모여 울진군의 사회운동을 계승하면서 조선의 독립 및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서로 공감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공개적인 외형을 띠면서 실상은 비밀결사의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을 계획하여 전통적인 계(契) 조직을 외양을 갖추기로 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중순경 남원수, 장응두, 노하순, 최효대, 장세전, 전찬문 등이 준향계(準香契)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계원은 9명에 계장은 최연장자인 최효대가 맡기로 하였으며 계의 목적은 외양상 상호 친목 도모로 정하였다. 또 계회는 매년 봄, 가을 2회로 결정하고 연령 순에 따라 각 계원의 집에서 돌아가며 열기로 하였다. 이후 준향계(準香契)는 1942년 5월까지 수십 차례의 계회를 열었다.
그런데 준향계가 활동하고 있던 1939년 여름 경 새로운 계(契)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울진 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독립 및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서 그 해 10월경 창유계(暢幽契)가 결성되었다.
창유계는 자체적인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지던 중 1943년 3월 중경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같은 달 19일에는 지방의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중경으로 출발하려 했던 계원 장세전도 출발 전날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창유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단행되었다.
창유계원의 검거에 나선 일본인 울진경찰서장 나가토미[中富]는 일본인 고등계 형사 여러 명과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계원 최황순(崔晃淳)의 집에 있던 사진을 근거로 수색을 시작하여 창유계 관련자 102명을 검거하여 울진연무장에 수감한 후 61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1명을 입건 구속시켰다.
[활동사항]
창유계는 정기 계회를 매년 3월과 9월에 계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계의 목적을 외양상 상호 친목으로 정하였으며 계장 1인, 계원 15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각 계원은 2원씩 계비를 내도록 정하였으며 비밀을 엄수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여 동지를 획득하자는 행동방침을 결정하였다. 계의 운동은 울진농민조합의 조직과 운영에 이론적 경험이 풍부했던 최학소의 지도를 받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창유계는 1942년 5월경까지 모두 64회에 걸쳐 계회를 열었다.
[의의와 평가]
창유계는 울진농민조합의 붕괴로 사회운동이 침체 국면에 빠져 있을 때 활동한 독립운동 조직체였다. 특히 울진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여 조선의 독립 및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그 운동이 일제 말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