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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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의미역 |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6·25사변,6·25동란,한국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의 전면전.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경상북도 울진 일대에서 있었던 전쟁으로, 민족해방을 표방한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을 숙청하고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군민들을 강제 동원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1950년 9월 연합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반격을 감행함으로써 이후 북한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48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이 새로 수립되었으나, 국내 정치 세력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48년 4월 제주 4·3사태, 10월 여수·순천 사건 및 11월 대구 폭동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는 등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은 경제 정책의 연이은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불안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토지 개혁을 합리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이 참패를 하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당선된 것은 이 같은 민심이 드러난 결과였다.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 하여금 남한을 침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발단]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받아 인민군을 창설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6·25전쟁 발발 직전 북한의 군사력은 보병 10개 사단, 전차 242대, 항공기 211대에 이르렀다. 이에 비하여 남한의 군사력은 겨우 보병 8개 사단에 전차는 단 한 대도 없었으며, 항공기는 연습기 10대에 불과하여 북한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때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고,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대만과 한국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북한의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한 북한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3개월 만에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사전에 충분히 계획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군이 초전에서는 당연히 우세하였다. 이에 미국에서는 지상군을 파병하였고, 이어 유엔에서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동해안의 경우에는 울진을 지나 포항까지 인민군이 진격하였기 때문에 포항에 방어선이 설정되었다. 결국 울진 지역은 인민군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을 표방한 북한의 점령 정책에 따라 인민재판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하는 공포정치가 시행되었다. 직업동맹·농민동맹·민주청년동맹·여성동맹 등 여러 전위 단체들이 조직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 정책의 일환으로 시·군·면·리에서 강제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폭격 속에서도 도로·교량의 복구 수리와 군수품 및 식량 운반을 위하여 군민들을 동원하였고, 청년과 소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징집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였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8일 인천 상륙 작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을 감행하였다. 9월 26일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그리고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이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도선으로 계속 북상함에 따라 울진도 인민군의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1951년 1월 25일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재개하여 3월 14일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3월 24일에는 38도선을 다시 돌파하였기 때문에 인민군이 울진까지는 남진하지 못하였다.
전쟁이 소련과 북한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전 양상을 띠자 소련은 유엔을 통해서 휴전을 제의하였다. 1951년 7월 개성(開城)에서 처음으로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고, 휴전 교섭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당시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정하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때 한국 정부는 휴전에 극력 반대하였지만 결국은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의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 원조 및 한국군의 증강 등을 약속받고 이에 동의하였다.
[결과]
6·25전쟁은 한국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산업 시설과 건물·도로·교량 등이 거의 파괴되어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피해는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민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남한과 북한의 대립이 굳어졌다는 데 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국토는 황폐해지고 산업 시설은 파괴되었으며, 민족 내부의 갈등 및 남한과 북한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평화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