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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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의미역 | Korean War |
이칭/별칭 | 6·25사변,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선 이남을 침공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개설]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 Korean War)[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고들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현재까지 휴전선에 의해 남분 분단 상태로 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나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울릉도는 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는 않았지만 경북도청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도민의 식량이 고갈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행정 책임자였던 군수 홍성국이 울릉도민 김만수(金萬秀)의 소유인 100톤급 천양호(天陽號)를 차출하여, 군수 자신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편승하여 포항을 거쳐 대구에 이르러 도지사에게 울릉도의 상황을 보고하고 식량을 긴급 배정받았다.
포항에서 화물선 2척에 식량을 나누어 싣고, 전쟁으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어 발이 묶인 도민 수백 명을 싣고 울릉도로 출발하였다. 3척 중 1척만 무사히 입도하였고, 1척은 풍랑으로 조난을 당해 일본의 시마네현에 표류되었다가 돌아왔으며, 1척은 선복(船腹)에 구멍이 뚫어져 적재한 식량 일부를 바다에 던지고 울진군 후포항으로 귀항하여 선박을 수리한 후에 입도하였다.
[경과]
6·25전쟁 동안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의 귀속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근거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1951년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 집합체인 연합국들이 일본과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합의하고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 규정된 국제질서가 바로 현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간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제2조(a)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바로 이 조문에는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로서 독도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독도는 일본 땅으로 남았다고 줄곧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 반대하고 있다. 독도는 처음 미국의 초안에는 포함되어 있는데 일본의 로비에 의해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 일부를 허용하였고 일본에 자위대가 만들어졌다. 미국은 공산권에 대한 아시아의 교두보 역할을 일본에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의 변화가 독도영유권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결과]
6·25전쟁, 그리고 독도에 미군 폭격이 있던 무렵, 독도를 두고 한일 간에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울릉도민의 삶의 터전인 독도를 지키려고 울릉도민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 창설은 울릉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평화선을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독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1953년 6월에는 일본 해안보안청 순시선이 30여 명의 관리와 경찰을 독도에 상륙시켜 ‘일본령 다케시마[죽도]’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게시판을 설치했다.
당시 울릉도는 전쟁으로 인해 육지로부터의 식량공급이 급격히 줄고,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 자급률이 30%도 되지 않았다.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는 3개월 밖에 버틸 수가 없었다. 나머지 9개월분 양식은 수산물을 육지에 팔아 구해야만 했다. 그나마 전쟁으로 인해 육지로 가는 뱃길마저 끊어졌다.
여기에 중공군 포로의 배낭에서 울릉도에서 수출된 오징어가 발견되자 울릉도 오징어에 대한 수출금지가 내려졌다. 울릉도 오징어잡이 배들은 오징어잡이를 포기하고, 대신 독도 근해로 나아가 오징어보다 수익성이 좋은 미역이나 소라, 전복, 흑돔, 우럭 등을 잡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 일본은 독도에 자국의 영토라는 푯말을 꽂고 독도 주변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울릉도 어민들에게 ‘자기네 땅에서 나갈 것’을 요구했다.
울릉군수와 경찰서장이 이 같은 사실을 경북도지사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요구했지만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울릉도 주민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하여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 4월 20일부터 1956년 12월 30일까지 울릉도민의 삶의 터전인 독도를 수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