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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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乾夏 |
영어음역 | Yi Geonha |
이칭/별칭 | 대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상규 |
[정의]
조선 말기 울릉도의 정황을 조사하게 한 문신.
[개설]
1899년(고종 36)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는 울릉도(鬱陵島)를 개척한 지 여러 해가 지나 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개간됨에 따라, 본부(本部)에서 시찰위원을 임용하여 해도(該島)에 가서 정형을 자세히 조사하는 동시에 주민들이 안착할 수 있도록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시(大始). 아버지는 이인화(李寅和)로, 이인우(李寅禹)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교리가 되었다. 1873년 좌승지·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이듬해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으로 선발되었다. 1877년 이조참의, 1879년 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1882년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 국조어첩서사관(國朝御牒書寫官)이 되었다. 1886년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889년에는 예조참판으로서 왕세자섭행태묘동향(王世子攝行太廟冬享) 때에 찬의사(贊儀使)로 참례하였으며, 이 해 대호군이 되었다.
189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892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민종묵(閔種默)과 교체되어 동지겸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새로 조직된 22부(府) 중 공주부관찰사가 되었다가 다시 충청남도관찰사를 지냈다. 1898년에는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이 되었으며, 시종원경(侍從院卿)·태의원경(太醫院卿) 등을 역임하고 1899년 비서원경(秘書院卿)을 거쳐 내부대신이 되었다.
이 해 의정부의정 윤용선(尹容善)이 내부의 주본(奏本)이 수령의 서임에 무원칙하다 하여 징계를 올려 내부대신에서 면직되었다. 학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궁내부대신임시서리를 겸하였다가 다시 내부대신으로 재임명되어 1902년까지 계속 재임하였다. 1899년 내부대신으로 재임명된 뒤, 울릉도 개척을 위해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해 호구와 토지의 개간 정도를 조사하고, 주민을 안돈시키는 데 힘썼다. 또 호구의 결손이 많은 각 부군의 수령을 처벌해 민수(民數)의 정확한 파악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正官)·의정부의정서리(議政府議政署理), 1901년 임시서리법부대신사무(臨時署理法部大臣事務)·서리의정사무(署理議政事務)·혜민원총재(惠民院總裁)·홍문관학사·규장각학사, 1902년 양지아문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궁내부특진관·시종원경·임시서리학부대신사무를 지냈다.
이 해 일본정부가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 개척권을 50년간 양도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때 박기양(朴箕陽)·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해 반대상소를 올리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해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확보를 저지하였다. 1905년 홍문관학사를 거쳐 충청남도관찰사를 지내다 훈이등팔괘장(勳二等八卦章)을 받았고 중추원부의장·중추원찬의를 맡았다.
[상훈과 추모]
국권강탈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