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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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後期佛敎再建-象徵, 完州松廣寺 |
영어공식명칭 | A Symbol of the buddhism reconstruction in the late of Chosun Dinasty, Wanju Songgwang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정환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송광사의 위상과 가치.
[개설]
[송광사의 내력]
전라북도 완주군의 송광사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5년(583) 터를 잡고,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迦智山門)의 3대 조사인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36년 세워진 송광사 개창비에는 그 내용은 보이지 않고,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폐허가 된 이 송광사 터를 지나다가 대성지임을 알고 표시해두었다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 개창 후 제자들에게 중창을 부탁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벽계(壁溪) 정심선사(淨心禪師)가 수행하던 명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마를 입었다. 1622년에는 덕림(德林),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50일간 화엄 법회를 열고 대화주가 되어, 본격적인 불사가 이어져 송광사 개창비가 세워진 1636년까지 불사가 이어져 대가람을 완성하였다.
「시왕조성흘공기(十王造成訖功記)」[1640]에 따르면, 대웅전은 1623년에 완성되는데,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의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1639년에는 송광사 개창비를 세웠고, 1638년에는 대웅전 후불화를 조성하였다. 1638년부터 1641년에는 조각승 청헌(淸憲)이 소조삼세불을 조성하였고, 1640년에는 명부전 시왕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하였으며, 1646년에는 사왕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아울러 1656년에는 나한전 석가여래좌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였다. 한편, 「대웅전중건상량문(大雄殿重建上樑文)」[1857]에 따르면, 대웅전은 1707년, 1814년, 1857년 중수되는데, 1814년 또는 1857년의 중수 시 현재와 같은 단층으로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4년에는 약사전이 중수되었고, 1934년에는 극인(克仁)이 나한전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은 1814년 사찰 앞 조계교가 있던 곳으로 옮겼다가 1944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1989년에는 삼성각을, 1992년에는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2000년과 2002년에는 각각 송광사 중창비와 세심정을 건립하였고, 2013~2014년에는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송광사의 불교 미술품]
조선시대에 건립되었거나 중건된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명부전(冥府殿) 등 불전을 비롯하여 형태가 특이한 십자각(十字閣), 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 등의 문이 남아 있다. 대웅전[보물 제1243호]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형태로, 외3출목, 내3출목의 다포식 겹처마이다. 내부는 고주 4주를 세워 후불벽을 친 후 그 앞에 수미단을 조성하였다. 수미단 위에는 높이 540cm의 소조삼세불[1641]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은 현재 대웅전 뒤쪽 오른편의 남동향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의 공포를 주심에만 배치하고 평방을 생략한 주심포계통의 건물이다. 이 건물 내부에는 1656년에 조성된 석가여래좌상과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나, 공포의 형태나 장엄 등으로 볼 때 1857년 대웅전 중건 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명부전은 대웅전 앞마당 오른편에 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들보 위에 바로 도리를 얹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명부전 내부의 「시왕조성흘공기」에 따르면, 1640년 3월~7월 사이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244호인 십자각은 십자형 평면 위에 다포식 팔작지붕을 교차시킨 중층 건물이다. 위층은 마룻바닥에, 계단만 개방하고 계자각난간을 둘렀으며, 아래층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십자각 내부에 예전에는 1716년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되었다가 1769년 중수된 종을 비롯하여 북·목어·운판 등을 걸려 있었으나, 현재 종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인 일주문은 맞배지붕 형태로, 다포식 겹처마에 3출목이고, 양 기둥은 민흘림이다. 양 기둥과 네 개의 보조기둥은 자연석을 주초석으로 삼고 있다. 일주문에는 일중 김충현이 좌서한 ‘終南山松廣寺(종남산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문[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2단이며, 지붕은 다포식 단처마로 외 3출목, 내 4출목이다. 금강문 내부에는 금강역사상과 동자상 2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자상 중 하나는 사자를 다른 하나는 코끼리를 타고 있는데,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익공맞배집 건물이다.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 2구씩을 마주 보도록 배치하였다.
대웅전 내부에 있는 소조삼세불은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었는데, 불상의 복장에서 조성기가 발견됨에 따라 1641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세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 약사여래를, 오른쪽에 아미타여래를 배치하였다. 조성기는 조성 시기뿐만 아니라 이 삼세불이 당시의 주상과 왕비는 물론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와 봉림대군의 환국을 기원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시주자로 벽암대사 각성을 비롯하여 신자 19명, 승려 160명이 등장하며, 청헌(淸憲)을 비롯한 화원도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불상은 엄숙한 표정의 얼굴, 건장한 신체, 손을 발 위에 닿을 정도로 낮게 두는 기법 등 청헌 또는 그의 일파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편 불상 곁에 있는 ‘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가 쓰인 3기의 전패가 있다. 주상전하 전패 뒷면에 ‘順治歲有靑鳥月在 … 三月落成 … 時主持弘信 …’의 묵서가 있어, 인조 연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른 2위의 전패 뒷면에는 ‘乾隆五十七年 壬子五月 日 重修三殿牌也’라는 묵서가 있어 정조 16년이던 1792년 수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등이 봉안된 석가여래좌상 복장에서 「造成回願文」이 발견되어 순치 13년 즉, 1656년에 봉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상 역시 벽암 각성이 주도하였고, 대웅전 소조삼세불과 달리 화원은 수열(守悅), 무염(無染) 등이 참여하였다. 이 불상은 턱과 뺨의 얼굴 근육과 양감이 굴곡 있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며, 왼쪽 팔의 Ω형 옷 주름,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인 두 다리의 옷 주름이 특징인데, 이는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1633], 전라북도 완주군 정수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1652] 등 무염이 제작에 참여한 불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가모니의 좌우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협시보살상이 있는데, 발원문에 나와 있듯이 좌협시는 석가모니의 전생이었던 제화갈라보살, 우협시는 미래에 올 미륵보살이다. 16나한상과 함께 제석천, 동녀, 사자, 금강역사 등은 석가여래좌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석고제 오백나한상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 삼존상과 함께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왕조성흘공기」에 따르면, 승명(勝明)이 경진년[1640년] 시왕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장보살의 좌협시는 합장한 도명존자이고, 우협시인 무독귀왕은 시왕과 같은 형태의 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개를 숙인 방형의 지장보살상 얼굴, 가슴 앞 수평의 내의, 사각형의 시왕 얼굴, 오뚝한 코, 신체에 비해 작은 손 등 전라북도 완주군 정수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등 17세기 중엽 불상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천왕문 안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보물 제1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조성시기는 보탑을 든 사천왕상 왼쪽[보기에는 오른쪽] 보관끈 뒷면을 떼어냈을 때, ‘順治乙丑年 十月日畢 金山畫面主造□爲□’라는 묵서가 있어, 1649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탑 밑바닥에서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性有天王重修時別會新造成也丙戌生’이라는 묵서가 있어 1786년 성유(性有)라는 인물이 이 보탑을 새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송광사 중심 경내에서 동북쪽에 소위 ‘부도밭’이라 부르는 승탑을 모아둔 곳이 있는데, 여기에는 1643년 건립된 송광사 개창비를 비롯하여 16기의 승탑과 2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송광사 개창비는 귀부,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다. 귀부 위에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비좌가 높지 않아 두드러지지 않으며, 거북머리와 이수의 용은 형식화되었다. 비신의 전면의 첫머리는 ‘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라고 되었으며, 뒷면 끝에 ‘崇禎丙子十月 日建’이라고 되어 있어, 1634년 조성된 송광사 개창비임을 알 수 있다. 탑 가운데 탑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암당 등 12기이다.
그리고 십자각에 걸려있던 동종은 현재 요사채로 사용하는 관음전[적묵당] 툇마루에 걸려 있다. 이 범종은 천판 위에 용통과 용뉴를 갖추고 있으며, 종신 맨 상부에는 59엽의 세운 연꽃잎 장식이 둘려져 있으며, 종신 상단에는 연꽃무늬와 연주문이 있고, 종신의 맨 아래에는 연꽃 넝쿨무늬가 새겨져 문양띠[하대]가 있다. 종신 중앙에는 9개의 연뢰[유두]가 있는 연곽[유곽] 4개가 있으며, 보살상과 위패 모양 장식이 있다. 명문은 양각과 음각 2가지가 있는데, 양각은 종을 만들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康熙五十年丙申四月 全羅右道 光州無等山 證心寺菴 ……’인데, 이로써 1716년 증심사에 걸기 위해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음각된 글자는 ‘大施主 癸卯生蔡龜 乾隆三十四年己丑九月日 重修文光得’로 1769년에 채구의 시주로 문광득이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범종은 포탄형 몸체에 음통과 단룡의 용뉴를 갖춘 전형적인 신라종 형태에 고려종의 특징인 종신 맨 위의 세운 연꽃 장식, 보살상, 위패 모양까지 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은 대체로 1600년대 2/4분기~1700년대 1/4분기 조선종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렇듯 완주 송광사의 불교 미술품은 다양한 건축물은 물론이고 불상, 석조물, 금속공예품 등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조성 시기가 1600년 전반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의 불교미술뿐만 아니라 불교사에서 불교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송광사의 고승과 의승군 활동]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 개창비에는 벽암 각성[1575~1660]이 새겨져 있는데, 그만큼 송광사 중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송광사 개창비에 따르면, 벽암 각성은 부휴 선수[1543~1614]의 제자이자 부용 영관[1485~1571]의 법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벽암대사는 10세에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출가하였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다. 전란 이후에는 스승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충휘(冲徽), 태능(太能), 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1612년 무고 때문에 그의 스승 선수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뒤 봉은사 주지 겸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을 겸하였다. 1622년 해인사 대장경판고 중영, 1622년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 개창, 1624년에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때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1632년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교화에 힘쓰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3천 명의 승군을 모아 ‘항마군’이 명명하고 승병장이 되었다. 호남의 관군과 함께 근왕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갔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640년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를 재건하였고, 1640년 8월에는 전라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벽암은 1646년 가을 동문 희언(熙彦)과 함께 속리산 법주사에 은거하였고, 희언이 화엄사에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가 지내다가 1660년 입적하였다.
벽암은 임진왜란 때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부휴와 벽암이 지휘하였던 의승군은 주로 수군으로 활약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사천왕상이 조성된 사찰 가운데 벽암 각성과 관련이 있거나 승군의 본거지였던 곳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를 비롯하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 전라남도 고흥군 능가사, 경상남도 남해군 용문사,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등 수군의 근거지는 아니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방어에 결정적이었던 웅치전투가 벌어졌던 곳과 송광사가 가까운 점으로 보아 송광사 승려 역시 의승군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송광사 중창 때 벽암을 초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도 송광사에서는 당시 국왕인 인조를 비롯하여 왕비, 세자 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소조삼세불과 전패를 조성한 것으로 보아,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당시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호국의 염원을 담았을 것이다.
[송광사의 위상과 가치]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불교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웅전 소조삼세불,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사천왕상 등 불상은 조성기가 확인되어 불상의 조성 시기와 조각장을 알려주고 있다. 건축사적으로도 특이한 평면의 십자각은 물론이고 대웅전, 나한전 등의 전각들은 19세기 사장(私匠)의 참여를 보여주고 있다. 비와 승탑 등 석조미술품 역시 17세기 이후 일반적인 경향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높아진 승려들의 위상에 따라 조성되었던 사찰의 재건 활동 가운데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에 참여하고, 병자호란 때에는 승병장이었던 벽암 각성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들이 동참하여 불사의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과 병자호란 때 전주·남원 지역의 의승군과 연합하였던 선조의 외척 신익성이 송광사 개창비를 짓고 썼다. 17세기 중창된 수많은 사찰 가운데, 이 송광사처럼 왕실과 불교계가 연합하여 중창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표적인 호국 사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