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17
한자 楊州市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395년 - 양주부로 승격
변천 시기/일시 1466년 - 양주부에서 양주목으로 승격
변천 시기/일시 1895년 - 양주목에서 양주군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2000년 9월 25일연표보기 - 양주군청사, 의정부에서 양주군 남방동으로 이전
변천 시기/일시 2003년 10월 19일 - 양주군에서 양주시로 승격
소재지 양주시청 -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 1533[남방동 1-1]지도보기

[정의]

경기도의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

[위치 및 지리]

동쪽으로 포천군, 서쪽으로 파주시 및 고양시, 남쪽으로 서울특별시 및 의정부시, 북쪽으로 동두천시 및 연천군과 각각 접해 있으며, 동서의 거리는 20㎞, 남북의 거리는 30㎞이다. 대체로 산지가 많이 발달해 있으며, 평지는 적은 편이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어 영산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악산(紺嶽山)[675m], 양주시의 주산(主山)으로 작은 북한산이라고 불리는 불곡산(佛谷山)[466m], 아름다운 일곱 봉우리로 이루어진 칠봉산(七峰山)[560m], 하늘이 내린 보배로운 산이라는 뜻을 가진 천보산(天寶山)[336m] 등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조선 시대 양주목의 중심 하천이었던 유양천(維楊川), 서울로 연결되는 중랑천(中浪川), 양주시의 남북을 길게 가로지르는 신천(莘川), 장흥면을 굽이쳐 흐르는 공릉천(恭陵川) 등이 대표적이다.

[면적과 인구]

양주시의 면적은 2011년 6월 현재 310.24㎢로 경기도 면적 1만 183㎢의 2.9%를 점유하고 있다. 지목별로는 임야가 187.24㎢로 60.4%를 점유하고 있으며, 대지는 9.71㎢로 3.1%, 농지는 71.30㎢로 23.0%로 나타나고 있다. 인구는 19만 7555명[남자 10만 838명, 여자 9만 6717명]이고, 행정 구역은 백석읍·은현면·남면·광적면·장흥면·양주1동·양주2동·회천1동·회천2동·회천3동·회천4동 등 1읍 4면 6동[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17개]이다. 시청 소재지는 양주시 남방동이다.

[기후]

양주시는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지역 여건상 기온의 연교차가 큰 북부의 대륙성 기후와 남부의 난온대 기후의 중간적 특색을 띠고 있어 여름은 고온다습하며, 겨울은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심한 저온 현상이 나타난다. 강수량은 10년간 평균 1,329.6㎜, 최고 강수량은 1998년의 2,080㎜로 기록되어 있다.

[행정 구역의 변천]

양주 지역은 원래 삼한 시대 마한에 속하였던 땅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따라 고구려의 매성군(買省郡) 또는 창화군(昌化郡)으로 불렸으며, 다시 백제 땅으로 환원되었다가 결국에는 신라가 점령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는 내소군(來蘇郡)에 속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에는 견주(見州)라 불렸다.

조선 시대 들어와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함께 양주 지역은 1395년에 양주부(楊州府)로 승격하였다. 1397년(태조 6)에 치소를 지금의 고읍동으로 이전하고 양주라 칭하였으며, 1466년(세조 12)에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폐치되었지만 1506년(중종 1) 지금의 유양동을 중심으로 다시 양주목이 복원된 이후 조선 시대 전 기간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전국의 지방 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양주군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남양주, 의정부, 동두천, 서울 동북부 지역[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0년 9월 25일 의정부에 있던 양주군청을 남방동 1-1번지로 이전하였으며,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 유적]

양주시는 삼국 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이자 수도에 근접한 거대 행정 구역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다. 당나라를 물리치고 신라가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무대가 된 매초성, 조선 개국의 두 주인공인 태조 이성계(李成桂)무학대사(無學大師)가 머물렀고 조선 시대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던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 중종의 첫째 부인으로 비운의 역사를 산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무덤인 양주 온릉(溫陵) 등이 모두 양주시에 있다.

현재 양주시에 존재하는 문화 유적을 살펴보면 국가 지정 문화재[보물 3, 사적 2, 천연기념물 1, 중요 민속문화재 1, 국가 무형 문화재 2], 경기도 지정 문화재[유형 문화재 6, 기념물 9, 민속자료 1, 무형 문화재 3], 문화재 자료 5점, 향토 유적 15점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를 살펴보면 불교 문화재로는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한 양주 회암사지[사적 제128호]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1호] 등이 있다. 능묘로는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온릉[사적 제210호], 석현리권율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2호], 삼하리이수광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49호], 광적면 효촌리백인걸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58호] 등이 있다.

그밖에 양주시 남면 매곡리양주 백수현 가옥[중요 민속문화재 제128호], 유양동어사대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82호], 백석읍 연곡리해유령 전첩지[경기도 기념물 제39호], 남면 황방리에 있는 양주 황방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8호], 장흥면 삼하리노고산 독재동 추사 필적 암각문[경기도 기념물 제97호], 양주별산대놀이[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 양주소놀이굿[국가 무형 문화재 제70호] 등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