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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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羅 |
이칭/별칭 | 서라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정덕 |
[정의]
삼국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국가.
[개설]
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불교를 공인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내부의 결속을 확고히 다진 결과 진흥왕 대에는 소백산맥 지역의 고구려 세력을 축출하고 북으로 영토를 넓혀 함흥·평양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어 영서 일대의 말갈을 추격하며 북상하여 한강을 따라 남하하며 한강 유역을 장악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긴 후 국력을 정비하여 문주왕 이래의 숙원이었던 고토(古土) 한강 유역의 수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551년 동맹군인 신라, 가야와 함께 연합군을 출진시켜 한강 유역의 6개 군을 공취, 마침내 고토 수복의 대망을 실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553년(진흥왕 14) 동맹군인 신라가 이탈하여 백제가 점령한 한강 유역을 탈취하고 이에 격분한 성왕이 신라로 쳐들어갔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전사하면서 한강 유역은 결국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신라의 양주 지역 경영]
553년 7월 신라는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4년 후인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다시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로, 그리고 604년(진평왕 26)에는 다시 북한산주로 고쳐졌다가 한산주로 최종 확정되었다. 진흥왕은 새로 획득한 지역을 직접 순수(巡狩)함으로써 새로운 영토의 주민을 위무하고 장병을 위로하는 한편, 새로 얻은 강역을 확고히 장악하는 수순을 밟았다. 물론 고구려가 말갈병을 동원하여 한강 유역 탈환에 나서기는 했지만 신라병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패퇴하여 양주 지역에서의 신라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대당 교역로를 확보하는 한편, 한강의 수운을 통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하게 되면서 삼국 통일을 향한 새로운 교두보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는 마침내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져 삼국 통일을 완성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삼국 통일은 다시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신라와 당의 갈등을 불러오고, 신라는 통일의 위업을 완성하기 위해 이제는 당나라와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나당 전쟁과 매초성 전투]
당은 옛날 고구려의 침공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여 한강 어귀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만들고 이후 이를 근거로 임진강을 건너 감악산을 지나 양주를 거쳐 광진나루를 넘는 이른바 장단로를 따라 남하하는 전통적인 전술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당의 진격로상에 위치한 양주는 주요 격전지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675년 나당 전쟁의 최대 규모이며 이 전쟁을 실질적으로 종결짓는 매초성(買肖城)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675년 9월 29일 양주로 진출한 당군은 감악산 지역에 본진을 두고 신라군의 본진인 매초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대패를 당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로서 나당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귀착되는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676년 11월 마지막으로 기벌포(伎伐浦) 해전[기벌포는 지금의 금강 하구로 비정]에서 신라의 수군이 당의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꺾고 비록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삼국의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나당 전쟁의 결정적 승기가 된 매초성 전투의 현장이 양주라는 것은 기록에 명시된 것처럼 분명하지만 매초성의 위치를 두고는 여러 갈래의 다른 설명이 있어 왔다. 현재로서는 매초성의 위치를 한탄강 가의 대전리 산성에 비정하는 것이 대세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방리토성설이나, 양주 대모산성설이 여전히 검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매초성이 양주에 있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 있고, 둘째 양주의 고구려 당시 지명이 매성현(買省縣)이어서 두 지명이 몹시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매초성 전투를 둘러싸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가 대승을 거둔 전투라고 기록하지만 중국 측의 사료에는 당이 승리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매초성 전투가 양주 전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평야전이었고 전투 기간에 진행된 여러 과정에서 당은 자신들이 승리한 전투만을 부각한 결과로 해석된다. 따라서 남방리 토성이나 양주 대모산성에서도 전체적으로는 매초성 전투의 한 부분인 나당 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충분한 개연이 있다.
[통일 신라의 양주 경영]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옛 강역을 각각 3개의 주(州)로 개편하였는데, 양주 지역은 진흥왕 대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설치하였던 북한산주를 개편한 한주(漢州)에 속하였고, 한주에는 한강 유역이라는 방어 거점의 중요성을 참작하여 다른 주와는 달리 2개의 정(停)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한편 경덕왕 대에 이르면 기존의 고구려 행정 지명이 모두 한자화되면서 양주 지역의 행정 명칭을 내소군(來蘇郡)이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개정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서도 양주는 여전히 임진강과 한강 수운의 요충으로서 한반도 중부의 방어와 물류, 교통의 중심지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양주의 입지를 반영한 것이 바로 김범문(金梵文)[?~825]의 난이다. 무열계와 내물계의 왕권 다툼의 결과 신라 왕위 계승에 실패한 김주원(金周元)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822년에 반란을 일으켜 주살되었다.
이후 다시 기회를 노리던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825년 양주를 근거지로 신라 중앙 정부를 향한 반란을 일으키지만 도독(都督) 총명(聰明)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도 잡혀 죽었다. 비록 김범문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후일 왕건(王建)의 패서(浿西) 세력이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한강의 수운과 육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양주의 입지는 통일 신라 시대 내내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