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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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石面 三一 萬歲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창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7일 - 만세 시위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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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5월 23일 - 안종규, 안종태 등 징역 선고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안씨 형제 등 600여 명 시위 참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에서 양주군 최초의 만세 시위 개시 |
발생|시작 장소 | 백석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
종결 장소 | 백석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오산리 |
성격 | 만세시위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안종태|안종규|김대현|이사범|조필선 |
[정의]
1919년 3월 27일과 28일에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현 백석읍]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개설]
백석면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은 구장인 안종규였다. 만세 운동이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구장[이장]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일제는 1914년 면제를 개편하면서 식민지행정 말단 기구로서 면제를 확립하였으나, 리 단위의 향촌 사회는 전통의 면리제의 질서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구장은 향촌 사회의 실무를 관장하며 마을의 여론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동원과 연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경기도 양주 지역은 의병 운동의 전통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한 주민들의 역사적 인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서울과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점차 격렬하게 확산되는 서울의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특히 1919년 3·1 운동 초기부터 5일장으로 운영되던 전통 시장을 통해 시시각각 전파되었으며, 양주군 전역에서는 만세 운동에 대한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독립 만세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경과]
양주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당시 양주군에 속해 있던 미금면에서 제일 먼저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군 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백석면 3·1 만세 운동도 이러한 영향 아래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연곡리 출신인 구장 안종규(安鍾奎)[1889~1946]는 그의 형인 안종태(安鍾泰)[1883~1920]와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김대현(金大鉉)[1872~?]·이사범(李士範)[1878~?]·조필선(趙弼善)[1888~1964] 등과 함께 거사를 추진하였다.
연곡리 만세 시위는 3월 27일 밤에 시작되었다. 3월말 경은 만세 시위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라 있던 때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주동자인 안종태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행하였다. 그리고 안종규·안종태 형제는 다음날인 3월 28일 김대현·이사범·조필선 등 주민 600여 명과 함께 10여 리 떨어진 오산리 대들벌로 시위 군중을 이끌고 행진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백석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과]
시위를 주도한 사유로 안종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동지들과 함께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안종태는 일찍이 경기도 토목 측량 기사로 근무한 일이 있었으며, 이때 일제 토지 수탈의 본질을 깨닫고 고향 백석면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동생 안종규와 만세 시위를 추진하던 그는 특히 면민들에게 독립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만세 시위 직후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하였다. 그리고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이사범은 징역 1년형을, 조필선과 김대현은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만세 운동의 초기인 3월 초·중순에는 주로 서울이나 도시를 중심으로 학생과 청년의 투쟁이 주를 이루었던 것에 비해 3월 하순부터는 농민들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백석면 3·1 만세 운동은 그와 같은 만세 운동의 발전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이 같은 만세 시위는 3월 22일 서울 남대문에서 노동자·학생이 중심이 되어 개최한 노동자 대회 이후 만세 운동이 재개되었던 것에 일정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백석면 3·1 만세 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횃불 시위로 전개된 점이다. 횃불 시위는 조선 후기 농민 항쟁 이후 자주 사용된 방법으로 구릉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의 형태였다. 이러한 횃불 시위는 농민들을 만세 운동에 동참시키는 데 효과적 방법이기도 했다. 횃불 시위에 이어 다음날 600여 명의 대규모 주민을 동원하여 백석면사무소까지 만세 시위를 이어 나갔던 것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