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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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檜巖寺址 |
이칭/별칭 | 회암사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서지민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현재 - 양주 회암사지 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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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64년 6월 10일 - 양주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양주 회암사지 사적 재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6월 -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건축공사 완료 |
소재지 | 양주 회암사지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 6가 168-6] |
성격 | 절터 |
지정 면적 | 333,233㎡ |
소유자 | 국유|양주시 |
관리자 | 국유|양주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고려 전기~조선 시대의 절터.
[변천]
회암사(檜巖寺)가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명종 4) 금(金)나라의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1313년(충선왕 5)에는 태고(太古) 보우(普遇)[1301~1382]가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하였다고 하며,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나옹(懶翁) 혜근(惠勤)[1320~1376]이 회암사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회암사는 늦어도 12세기 무렵에는 이미 창건되어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사가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 말~조선 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인 1372년(공민왕 21)에는 혜근이 공민왕의 명으로 회암사에 와서 지공(指空)의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1374년(공민왕 23)부터 2년 동안 266칸의 대규모 중흥 불사를 벌여 1376년(우왕 2) 혜근의 제자 각전(覺田)이 완공하였다.
이색(李穡)[1328~1396]의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회암사는 승려 3,000여 명이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4.55m]의 불상 7구와 10척[3.03m]의 관음상이 봉안되었으며, 건물들은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東國) 제일(第一)로 중국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회암사가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하였는지를 잘 말해 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유신(儒臣)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로서 그 자리를 지켰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3년(태조 2) 무학(無學) 자초(自招)[1327~1405]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많은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7번이나 회암사에 다녀갔다.
또한 태조는 왕위를 물러나서도 1402년(태종 2) 자초에게 계를 받고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1405년(태종 5) 자초가 입적하자 자초의 탑비(塔碑)를 세웠다. 1424년(세종 6) 선교 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統廢合)할 때 회암사는 선종(禪宗)에 속하였으며, 다른 절보다 훨씬 많은 논 500결을 받고 250명의 승려가 머물러 조선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를 비롯한 많은 왕실 인물들이 회암사 불사(佛事)를 후원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1410~1481]이 쓴 「회암사 중창기(檜庵寺重創記)」에 의하면 1472년(성종 3)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종 때 수렴청정을 하였던 문정왕후가 보우(普雨)[1509~1565]를 통해서 불교 중흥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는 전국 제일의 수선 도량(修禪道場)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이로써 회암사는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영향력 있는 고승들이 주석(住席)하고 국가적 차원의 비호를 받는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웅장한 규모와 위세를 자랑하던 회암사는 문정왕후 사후(死後)에 사세(寺勢)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1566년(명종 21)]”라는 기록이나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1595년(선조 28)]”라는 기록을 볼 때, 1566~1595년 무렵 유생들의 방화(放火)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8차까지 이루어진 발굴 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 건축과는 달리 궁궐 건축의 건물 구조나 방식을 나타낸다. 즉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는 1997년부터 연차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서 그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가람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은 고려 시대의 궁궐이나 가람 배치의 특징과 같다.
또한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모두 64개소의 건물을 배치하여 종교적인 공간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각 건물의 기능적인 용도에 따라서 건물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암사 가람의 특징은, 남북의 축 선상에 건물을 배치하는 가람 배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왕실 사찰로서의 성격에 부합되도록 건물을 배열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용무늬 기와, 봉황 무늬 기와, 청기와, 잡상 등의 기와류나 왕실 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官窯)[경기도 광주 소재]의 도자류를 비롯하여 당시 왕실과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현황]
양주 회암사지는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양주 회암사지 내에 있는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2021년 6월 2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발굴 조사를 통해서 얻어진 중요 문화재를 보존하고, 이를 연구·전시·교육하기 위한 회암사지 박물관이 개관하였다. 회암사지 박물관은 고려 말~조선 초 최대 국찰(國刹)로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매우 큰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문화를 대변하는 종합적인 연구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다양한 박물관 사업을 기획,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