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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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龍和 |
이칭/별칭 | 운경(雲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이용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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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가납리에서 만세 시위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이용화 사망 |
출생지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
활동지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용화(李龍和)[1867~1919]는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京)이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광적면에서는 이용화가 만세 시위를 위해 백남식(白南式)·김진성(金辰成) 등과 함께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리고, 마을을 순방하며 시위 계획을 알리고 일장기를 변조해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28일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갑자기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시위가 지연되었다. 이용화는 김진성·백남식 등 동지들과 함께 진화 작업을 마친 후에 4㎞[10리] 거리인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로 가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침 가납리 주민들은 만세 시위를 마치고 해산하고 있었는데, 효촌리 주민들을 보고 다시 시위대에 가담해 그 수가 약 950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대는 지금의 만세배미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의정부에서는 헌병을 급파하였다. 해산을 종용하는 헌병을 향해 이용화가 꾸짖자 시위대의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는데, 이때 시위대 중 한 명이 헌병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자 헌병들이 총을 발포하여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이용화 등 세 명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