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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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藝 |
영어의미역 | Calligraphy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진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붓을 사용하여 글씨를 심미적으로 적는 행위 및 결과물.
[개설]
우리나라에서 서예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한사군(漢四郡)을 통해 한대의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고구려 때에는 위예법(魏隸法)에 동진 해법을 가미한 예해혼합풍(隸楷混合風)이 성행했던 듯하며, 그 서체의 예를 광개토대왕비에서 볼 수 있다. 백제의 서예는 왕희지체와 같이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의 남조풍(南朝風)이 근간을 이루었지만 말기에 가서는 북조풍이 가미되기도 했다.
신라의 서예는 고구려와 같이 북조풍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었으며,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의 서체는 단중하며 북비의 일등 성품과 비교될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김생은 왕희지체와 안진경체 등을 융합하여 개성이 뚜렷한 새로운 서풍을 만들어내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서예는 문사들의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정착되었고, 중기에 이르러 왕희지체가 성행하게 되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서예가 일반 회화와 함께 지식층의 심성 양성과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널리 인식되면서 확고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기의 송설체가 일종의 국서체로 풍미했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자관(寫字官) 출신인 한호(韓濩)에 의해 왕희지체에 조선화된 송설체가 가미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주자(朱子) 이전의 유학을 지향했던 허목(許穆)이 복고적인 서법을 추구하여 고문전(古文篆)이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여 후대 남인계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는 이숙(李淑)에 의해 왕희지의 진체(晉體)에 미불(米芾)의 필의를 가미한 동국진체(東國眞體)가 만들어졌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예는 청대 고증학파의 신서학 경향이 김정희에 의해 추사체(秋史體)로 완성되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교양 문화로 잔존했으며 주로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書部)를 통해 작품 활동을 했다. 근대적인 전문 서예계의 형성은 8·15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서예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현황]
1989년 한국서예협회 양산지부가 창립된 후 매년 정기 총회를 열고,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참가하고 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양산시지회전을 열어 시민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양산시 서예가들의 괄목할 만한 활동으로는 양산 출신 박제상을 기리며, 박제상의 이름을 양산시의 특성화와 연계시키기 위해 2002년 우국태·신경찬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발기인들이 박제상의 호를 빌려 관설당서예협회를 창립하였으며,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 규모의 관설당서예대전을 2002년도부터 시작했다.
2007년에 개관한 하북문화의집에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예 강좌를 운영하고 있고, 2008년에는 양산시 여성복지센터에서도 서예 강좌를 열고 있다. 같은 해 6월에는 한국미술협회양산지부에 속한 회원들의 서예 작품이 제11회 양산미술협회 정기전을 통해 전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