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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력으로 뭉친 소노마을 전임 이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C04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소노마을 정지영(50)은 1997년부터 10년간 마을 이장을 한 경력이 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이장을 하게 된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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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마을 전임 이장 정지영씨

정지영은 3살 때 부모님과 함께 김해에서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소노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 마을은 동래정씨 집성촌인데 그도 동래정씨 참의공파이다. 부모님은 재실 관리를 하고 문중 소유의 논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활했다. 그의 형제는 모두 6남매로 그 중 정지영은 다섯째이다.

지금은 돈을 받으며 재실관리를 해 주지만 그 때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은 많지. 땟거리 없지. 먹고 살기 위해서 들어갔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의 부모님도 자식들 먹여 살릴 걱정에 온갖 굳은 일을 다 했으며, 그도 입대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훈련소로 가다

정씨는 중학교 졸업 후 남들이 다 가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우리 클 때만 해도 그랬잖아요. 형님 뒷바라지하기도 어려운데 억지로 간다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집안 형편을 봐서 내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일찍 어른스러워진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 그런 결정을 하기가 분명 쉽지 않았으리라.

중학교 졸업 후 1년간 농사짓다가 연산동 폐차장 취업하여 1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직업훈련소 1년 수료하면 공고 진학 시험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신문 공고를 보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대한조선공사(현재 한진중공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가게 된다.

직업훈련소에서 1년간 용접, 절단, 현도(賢圖-배 몸체의 외관과 골조들을 마르기 위하여 배의 형태와 구성 요소들의 모양을 실제 크기대로 또는 줄여서 그리는 일. 또는 그런 그림) 마킹, 설계도면 작성 등을 배운 뒤 대한조선공사 현장으로 발령을 받아 현도 일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경남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야간에 입학을 했다. 첫 번째 목표인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3년 늦은 입학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비는 회사에서 부담했으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직장에도 충실했다. 학교에서 선반(旋盤)도 배웠다. 회사에서는 맡은 전문 직종이 있으니까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조선업계에 계속 근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야간 학생들은 대부분 정씨처럼 낮에는 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여러 기업체에서 야간 학교에 오다 보니까 그때만 해도 공부를 해서 전문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공부했다.”며 소년이 가졌던 꿈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정씨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내야만 했다. 영장이 나온 것이다. 직장에도 휴직계를 내고 1979년 입대했다. 직장생활의 공백과 함께 졸업이 늦춰질 될 수밖에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기본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의 백두산부대에 배치를 받아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그때 정보병 선임인 연기자 강남길과 함께 복무했는데, 정씨는 그 인연으로 제대 후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1998년 경, KBS의 ‘신고합니다’라는 프로그램의 첫 회 주인공이 강남길이었는데 함께 근무했던 전우들이 모여 강남길의 병영생활에 대한 추억담을 풀어내는 자리에 참석하여 군 생활을 추억하기도 했다. 방송에 앞서 2박 3일의 일정으로 복무했던 부대를 찾아가서 보초 섰던 자리에 서서 촬영하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정씨는 이장을 할 때였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는데도 방송이 나간 후 주위에서 알아보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단다.

▶ 작업 도중 손을 다쳐 실의에 빠지다

정씨는 32개월간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면서 복직을 했고 남은 학업을 계속하여 졸업을 했다. 사내 직업훈련소 수료, 고등학교 졸업, 군복무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일터로 돌아왔고, 무엇보다 배움에 대한 꿈을 이루게 해준 회사에 대한 배려는 고마웠지만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1982년에 거제 대우조선소로 직장을 옮기는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승진이나 임금 등 그런 조건이 생각대로 안 되었고, 다음 목표인 대학 진학 또한 어렵게 되자 어차피 하는 일이나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직장을 옮겼다. “현도 마킹하는 것을 보고 특채를 하니까 대학 안 나오더라도 조선업계에서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는 실력을 갖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우조선에서도 같은 일을 하게 되었고 1985년에는 결혼도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특채된 그곳에서도 사내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정씨가 소속된 부서가 해체되는 위기를 겪게 된다. 부서 구성원 7~8명의 인원이 한 명씩 다른 부서로 이동이 되면서 취부나 용접, 절단 등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그는 오랫동안 해 왔던 쇠 만지는 일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정씨는 “어린 나이에 연산동 폐차장에 간 것도 그 당시만 해도 취직만 하면 최고였기 때문이다. 정비 기술 배워서 나중에 정비기사가 되면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가게 된 것인데 워낙 쇳밥을 일찍부터 먹어서인지 쇠 만지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던 차에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던 동생이 입대하면서 부모님 모실 사람이 없게 되자 아내와 의논해서 1987년에 귀향을 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직장 다닐 때와 비교했을 때,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운 생활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귀향 이듬해인 1988년, 인근의 고려제강에 입사했다. 농사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한우 10마리를 키우면서 개도 길렀다. 퇴근 후에는 잔반을 날랐고, 야간 근무를 하고도 낮에는 농사를 하는 억척같은 생활을 했다.

1996년 어느 날, 열심히 사는 그에게 뜻하지 않는 큰일이 생기고 말았다. 근무 중, 맞물려 돌아가는 기어 사이에 장갑이 끼면서 순식간에 손가락 4개를 잃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사고는 순간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한 순간에 청년의 꿈이 산산조각 나면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시련이 닥쳤다. 몸도 마음도 상실감에 빠지고 말았다.

사고가 있은 뒤에 현장에서 근무할 수 없게 되자 회사에서는 창고나 경비 쪽의 일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동료들에 피해를 줄까봐 그만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접었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는 그런 시간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살아왔던 그 의욕이 무참히 꺾이면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마음을 추스르고 이 시련을 딛고 일어서기로 굳은 마음의 맹세를 했다.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데 불편하긴 했지만 굳이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사고가 나기 전, 작업의 능률을 올리고자 이앙기까지 사 놓았다가 손을 다치면서 다시는 농사지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그런 정씨에게 다시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주민들의 추천으로 이장을 맡게 된 것이 그것이다.

▶ 39세에 이장을 맡고 활력을 되찾다

1997년 1월 1일부로 소노마을에 39세의 젊은 이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씨는 활력을 되찾게 되었고 소노마을도 활기가 생겼다. 그는 2006년까지 10년 동안 이장을 맡아 마을일을 했다.

“사업도 엄청 많이 했어요. 다른 마을도 그렇겠지만 새해가 되면 마을사업을 계획하여 신청합니다. 신청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요즈음 살기가 좋아져서 도로복개, 포장 이런 부분은 웬만하면 다 해주잖아요.”라며 마을 환경 개선을 위해 펼쳤던 사업들을 꼽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큰 것은 마을 안길 포장, 양지마을 음지마을(소노마을 내에서도 편의상 양지, 음지로 나누어서 부르고 있음) 농로 포장, 도랑 측구(側溝)공사, 마을회관 신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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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로 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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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 신축

그래서인지 마을 어른들은 한결같이 “정 이장 잘했다.” “지영이 이장할 때 참 잘했지.”하며 칭찬한다. 그리고 “좀 더 해도 되는데……”라고 아쉬움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정씨는 “손이 불편하다고 의식해 본 적도 없다.”면서 “이장을 하면서 손을 다친 뒤에 내성적인 성격이 바뀌었다. 활발해지고 어디 가서 말도 잘하게 되었다. 손 다쳤을 때는 한동안 집에서 꼼짝도 안했다. 억수로 내성적인데다가 잘못하면 얼마나 추락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장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으니까 이장하길 잘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장을 하다가 어려운 점보다는 사회 사람도 많이 알게 되고 직장과 차이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직장생활 할 때보다 다른 점도 느끼게 되었다.”며 지난 시간을 술회한다.

정씨는 2000년 5월부터 아내와 함께 ‘원당영양탕’이라는 상호를 걸고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개업하기 두 달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기도 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선전 다 해 주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며 어머니가 주신 이승의 마지막 선물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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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영양탕

그의 슬하엔 남매를 두었는데 딸(정미희·24)은 부경대학교 국제통상학부 재학 중에 어학연수차 일본에 가 있고, 아들(정우인·22)은 경희대학교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 자신은 “없이 커도 복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이 이렇게 잘 성장했고 큰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 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고 말한다.

정씨의 희망사항은 딸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아들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바라는 그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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